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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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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의 길을 시작하면서부터 제 마음속에 품게 된 질문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교만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나의 생각, 나의 뜻대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판단을 이미 내리고 접근하였고 마치 내가 신의 대리인이 된 듯한 자세로 질문을 던졌으니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과정을 거치며 질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로 향해서 “과연 사람은 무엇으로 변화하는가?”가 되었습니다. 처음 질문에 비하면 덜 교만하지만 이 역시 교만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변화의 주체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공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내 삶에 하느님을 초청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변화를 위한 시작을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느님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변화의 주체라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성소 즉 거룩한 공간을 마련할 때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고 이 경험이 바로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체성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사랑의 자리입니다. 변화의 자리이고, 위로의 자리이고, 능력의 자리이고, 무엇보다 사랑의 자리입니다. 이 식탁 앞에서는 그 누구도 판단 받지 않고, 그 누구도 비교되지 않으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자격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마련된 사랑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경험하면 됩니다. 그 분과 그윽한 시선을 나누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 분이 주시는 음식을 나누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마련하신 식탁에 함께 하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전존재가 하느님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나누기 전에 잠시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주인이 손님을 초대하여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차를 따르는데 잔이 넘쳐도 멈추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손님은 주인에게 잔이 넘친다고 말하자 주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저와 이야기하려고 오셨으면 생각을 잠시 멈춰주십시오. 저와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득차 있는 머리와 가슴을 비워야 합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어떤 은혜의 말씀도, 그 어떤 위로의 말씀도, 그 어떤 사랑의 말씀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사순절 수요예배를 통해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를 본문으로 4번에 걸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의 내용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제정입니다. 잡히시던 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는 장면을 살펴보면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애틋한 사랑이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이제 곧 이들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극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똑같이 목숨을 걸고 그 길을 갔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던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과 깊은 관계가 바로 중요한 능력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세 번째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느님과의 동행은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을 통해 확증됨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겠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오늘 이제 17장의 말씀으로 대단원을 마치려고 합니다. 17장의 말씀은 대사제의 기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고, 두 번째로 사도들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의 제자들 곧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은 바로 이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주십시오.
 
구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손가락 안에 반드시 들어갈 장면은 홍해가 갈라지고 그 사이를 걷는 이스라엘 민족의 장면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무실에도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장면은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또한 장면은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무사히 사자들 사이에 서 있는 다니엘의 모습입니다. 이 역시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장면들은 매우 위험한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앞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군대가 쫓아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일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어떤 신학자는 왕의 대관식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고 다니엘이 처한 것 같은 위기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빛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오늘 우리는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공포와 번민에 싸이신 주님처럼 우리는 지금 두렵습니다. 세상 앞에 우리는 너무도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더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고 선포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겪으신 그 공포와 번민을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해야합니다. 저는 연약하고 무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이 고백이 진정한 믿음의 고백일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발을 떼는 것… 그 때 우리는 바다를 열어 길을 만드시는 하느님, 사자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그 하느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처럼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진정한 믿음과 실천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아는 것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부활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세상도, 가장 큰 세력인 죽음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방해물이 아닙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위대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졌고, 이제 바로 오늘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마련하신 이 사랑의 식탁에서 주님을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올바로 바라보며 그 분의 죽음과 영광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이미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를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