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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노년] 아브라함과 바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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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노년] 아브라함과 바울로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성서의 노인들

구약성서를 두루 살펴보면 노인들이 의외로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들의 계보에서는 물론 12부족 동맹과 왕정을 거치면서 원로급 예언자들과 사제들이 줄을 이어 나온다. 게다가 아브라함 이전의 전사前史시대로 가면 그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특히, 그 시대의 노인들은 곧잘 이삼백 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사실 이를 글자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노릇이다. 어디 인간 수명이 백세라도 넘어서는 게 쉬운가 말이다. 그처럼 구약의 노인들은 대체로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모습들로 그려져 있어 인간 냄새를 맡기는 힘들다. 이렇게 과장된 면면들은 모두 한 가지 점을 지향하는데 바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종교적인 인물을 그려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신약성서에도 노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딱히 노인의 특징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저 원로로서, 종교지도자로서 사회 전반에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정도이다. 이를테면, 아리마테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추종했던 최고회의 의원이나, 혹은 그 반대편에서 예수님을 공격했던 이들 중에 노인들이 상당히 많았을 텐데 그들에게서 딱히 노인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해내기는 어렵다. 신약성서의 노인들도 구약성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차원을 십분 고려해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노인들을 장황하게 거론하다가 자칫 평범하게 노년을 찬양하는 글이 될지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다.
신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노인들 중에 필자의 눈에 예외적인 모습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족장 아브라함과 필레몬서를 쓴 사도 바울로이다. 두 본문에서는 무엇인가 우리 삶에 직접 닿아있는 듯 익숙한 느낌이 풍겨 나온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약속의 자식을 하느님께 바쳐야했고 바울로는 노예 오네시모를 위해 정성 깃 든 편지를 쓴다.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대목들이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노년의 위용威容을 갖추었는지 살펴보면 그런대로 이 글의 목적과 부합될 듯싶다. 우선 바울로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필레몬에게

바울로는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처지에서 편지를 썼다. 이제 나이가 들을 만큼 들었고(필레 9) 지병 때문에 오랫동안 신체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갈라 4,13-14; 2고린 12,7-8;10,10). 게다가 옆에서 이렇다하게 그를 돌봐줄 가족도 없는 듯 했고, 유일한 도우미라곤 평소부터 잘 알고 지냈던 필레몬(골로사이 교회의 지도자?)의 노예 오네시모뿐이었다. 그런데 오네시모의 처지가 딱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도망쳤거나(11절) 재정적인 손해를 끼쳐 쫓겨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18절). 잘못하다간 주인에게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 처지란 게 다 그렇다는 말이다. 바울로는 오네시모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권을 가진 필레몬의 허락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아마 바울로는 오네시모에게 파피루스 종이 한 장을 구해오라고 했을 것이다(편지가 딱 파피루스 한 장에 들어갈 분량이다). 그리고 펜을 들기 전에 얼마간 고민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지 필레몬의 맘을 녹여낼 수 있을까?
편지를 읽으면서 바울로의 의도가 불분명해 보이는 대목들이 몇몇 있다. ‘명령을 할 수도 있지만 부탁을 한다.’, ‘(오네시모가) 그대에겐 쓸모없지만 나에겐 쓸모가 아주 많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에서 비롯되기를 바란다.’, ‘오네시모가 진 빚이 있으면 갚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당신이 내게 빚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 덕 좀 보겠지만 그대의 순종을 확신한다.’, ‘꼭 찾아갈 테니 방 하나 마련해달라’ 등등. 바울로는 필레몬과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이렇게 존중과 무례가 공존하는 편지를 썼을까?
바울로는 그리스 수사학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삼대 수사학으로 불리는 유비론, 우화론, 예형론 외에도 대인논법(디아트리베: 로마 3,1-8), 수미쌍관법(인클루시오), 논리를 전개하다가 한 템포 쉬어가는 여담餘談기법(디그레시오: 1고린 12-14장), 윤리 명령에 종종 등장하는 직설법/명령법에도 능통했다. 이 편지에 사용된 방법은 이른바 모순어법(옥시모론)이라는 것으로 의미가 상치하는 두 개념이나 문구를 조합해 특별한 표현을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이를테면, 이육사의 시 ‘절정絶頂’에 나오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에는 강철과 무지개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묶어 조국 광복을 향한 시인의 강렬한 의지를 표현한 바 있다.
바울로는 필레몬의 동의를 받아내려 고도의 심리 전술을 사용한다. 명령과 부탁, 강요와 자의自意, 쓸모 있음과 없음, 빚과 덕 등등.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살려주면서 자신이 얻어내려고 하는 바를 취하기 위함이다. 아마 펠레몬은 바울로의 편지를 읽고 나서 ‘사도께서 거절하기 힘든 부탁을 하시는구먼!’ 하며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일이다.
필레몬서에서 만나는 바울로는 맘이 넓은 사람이다. 그에게 오네시모의 전력前歷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형제가 된 이상 그를 정성껏 보듬어줄 뿐이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바울로는 신중한 사람이다.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긴 한데 필레몬의 선처善處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필레몬에게 명령하는 대신 설득의 길을 택했다. 오네시모를 어여삐 여기소서!
바울로의 젊은 시절은 이와 달랐다. 바울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동료 전도사들을 비난했고(2고린 11,11-15), 교우들을 어린 아기 취급하는 것(1고린 3,1-2)도 모자라 종종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2고린 11,12). 그러고도 지적 우월감이 목에까지 차 있어(갈라 3장) 교회 어르신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곤 했다(갈라 2,11-14). 아마 1세기 교회의 모든 좌충우돌은 바울로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갈라디아서와 고린토전.후서 등 바울로의 초기 편지들에서 칼날이 느껴지는 반면 필레몬서에는 여유와 관록이 느껴진다. 노년에 이르러 터득한 관조觀照의 지평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필레몬을 압박하는 차원도 예전과 사뭇 달라 보인다. “곧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그 때 당신이 나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필레 22) 편지를 읽고 나서 필레몬은 틀림없이 오네시모에게 해방(속량贖良)의 기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편지를 읽자마자 곧장 오네시모의 손을 붙잡고 속전贖錢을 바치러 신전으로 향했을 테니 말이다.

아브라함의 제사

우리의 삶에는 인간의 실존을 제한하는 몇몇 한계들이 있다. 그 중에서 자식을 잃는 고통만한 게 있을까? 학교 다녀오겠다며 아침에 나갔던 아들이 저녁때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면 부모는 왜 이런 불행이 자신에게 닥쳤는지 울부짖으며 세상을 원망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실존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5천 년 전에도 같은 사정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창세기 22장 1-19절). 신학자 G. 폰 라드는 그 아버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묵상했다.(『아브라함의 제사』)
이스라엘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느 날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받아 아들 이사악의 손을 잡고 길을 떠났다(1-3절). 제물로 바치기 위함이었다. 백 살이나 되어 겨우 아들 하나를 주신 하느님이 이제 정을 붙일 만하니까 도로 달라는 것이었다. 아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들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는지요?”
“야훼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8절)

아마 아비는 앞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걸어가면서 대답했을 것이다. 특히, 철학자 키엘케골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인간 실존의 한계를 읽어냈다. 자식의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 예라는 설명이다.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 역시 ‘아브라함의 제사’에 주목했다. 그는 사실 나열식으로 단순하게 흘러가는 본문 뒤에 무엇인가 폐부를 찌르는 진실이 서 있으리라는 상상을 했고 자신의 상상을 화폭에 옮겼다.
판화(1645년)에 보면 왼쪽의 늙은 아비가 상체를 숙이고 아들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도대체 아비는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아브라함의 육성은 들리지 않지만 그의 동작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을 가리키는 왼손의 검지와 자신의 심장을 짚는 오른손으로 아비는 말한다.

“얘야, 너는 이제 죽어야 한다. 아비가 곧 너의 목을 딸 것이다.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아비의 심장은 지금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낭떠러지를 뒤로 하여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아들은 아비의 말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아비의 시선을 피하고, 눈 밑이 어두워지고, 자신이 올라가 곧 타고 말 장작더미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실존철학자 키엘케골의 말을 더 들어보자. “만약 아브라함이 의심을 했더라면 그는 진실로 다른 위대하고 훌륭한 행위를 했을 것이다. 그는 모리야 산으로 가서 나무를 패고 쌓아 올린 장작에 불을 지피고는 칼을 뽑고 하느님에게 외쳤을 것이다. ‘이 제물을 업신여기지 마소서.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은 못되나이다. 저도 아나이다. 늙은 몸이 언약의 아이에 어찌 비기겠나이까. 그러하오나 저로서 바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나이다. 이사악이 이 일을 결코 알지 못하게 하소서. 젊음을 그늘 없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제 가슴을 뚫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돌리려고 사정하지도 않았다.”(『공포와 전율-도덕의 정지, 인간의 실존』)

아름다운 노년

성서의 노인들에 대한 일반론 대신에 신구약성서의 대표적인 노인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것도 두 사람의 전체 인생에서 극히 일부만 둘러보았을 따름이다. 고작 바울로의 편지 한 장과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이다. 그러나 두 인물이 살아온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익한 내용들이다.
노년이 아름답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몸은 하루하루 쇠약해 가고 얼굴을 쭈글쭈글, 추진력도 젊은 시절과 다르고 작은 일에 노여워지기 십상이다. 거기다 치매까지 찾아오면 그나 마의 삶마저 극도로 초라해진다. “진실은 무거운 것이라 젊은이만 질 수 있다.”(『탈무드』)고 하지 않는가?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더라도 노년을 찬양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비록 스스로 늙은이라고 밝혔지만 바울로의 편지에는 젊은 기운이 펄펄 살아있다. 사랑하는 수양아들(10절) 오네시모를 위해 결코 식지 않을 열정을 보여준다. 오네시모를 거절하는 것은 곧 바울로를 거절하는 것이며 바울로를 거절하는 것은 주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좀 보려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에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20절)
아브라함은 독한 사람이다.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도 어찌 ‘왜 하필이면 제 아들을 바쳐야 합니까?’라는 질문 한번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묵묵히 길을 나섰고 결국 자식의 목에 칼을 꽂아야 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만일 명령대로 실행했다면 아브라함의 기운도 소진해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한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소리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했다.”(11절)
일찍이 공자는 나이 칠십이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즉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고 했다(『論語』 爲政편). 바울로와 아브라함도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갔으나 결코 길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노년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다.
하느님이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