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성월요일: 요한 12:1-11

성월요일: 요한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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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본문을 살펴 보기 전에 두 가지를 먼저 간단하게 나누겠습니다. 다른 글을 쓰던 중에 “섬김”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섬김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비슷한 말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반대말을 찾기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어 음원학적으로 볼 때 serve의 반댓말은 observe라고 합니다. 한참을 생각해 보니 섬김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고 관찰은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회에서 말하는 섬김은 사랑이 기반이 되어 직접 참여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섬기지 않는 것은 함께 참여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늘 타자로 남아 있으며 그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나눌 이야기는 사순절동안 새벽기도 때 사용하고 있는 본 회퍼와 함께 하는 40일 묵상의 내용입니다. 본 회퍼 목사는 “공동체를 향한 자신의 기대와 소망을 버리지 않으면 공동체를 파괴하게 되고 이러한 기대와 소망은 다른 사람과 하느님을 심판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기대와 소망을 버린다는 것을 한참 동안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우리가 늘 말하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지 못하면 주님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공동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심판하게 됩니다. 내 가치관 내 기준을 변화시키지 않으려 할 때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 삶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보다, 교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면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에게 마리아가 다가와서 값진 향유를 발에 붓고 그것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책망하는 유다의 말에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고 대신 대답하셨습니다. 이 상황은 무슨 상황일까요?
 
이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것임을 이미 제자들에게 3번에 걸쳐 예고하셨고 본인은 지금 가는 길이 마지막 길임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셨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하는 마리아와 유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깊은 관계는 루가복음 10장에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마르타와 달리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일보다 예수님이 중요했고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돕게 해달라는 마르타의 말에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십니다. 마리아는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두렵게 하고 슬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과 슬픔에 붙잡혀 있지 않고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예수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을 선택한 마리아의 지혜로움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걱정에 사로 잡히지 마시고, 나는 안된다는 마음을 하지 마시고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바로 지금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이해하시고 알아주시고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또 한명의 주인공인 유다의 지적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일년치 연봉의 값어치를 가진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는 이 사건을 그는 철저한 자기 중심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는 예수님과 늘 동행했지만 예수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철저하게 낮아짐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 폭력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 무력함으로 그 폭력을 온 몸으로 맞으시며 목숨을 내어 주심으로 그 폭력을 이겨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라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의 시선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며 그렇기에 철저히 목적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이며 냉정합니다. 제가 설교 첫 부분에 잠깐 나눈 것처럼 마리아는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섬김의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갔다면 유다는 철저하게 분석하고 판단하는 관찰자로서 그 곳에 서 있습니다. 그는 늘 자신 안에서 그 일들의 의미를 찾아내고 결코 주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일은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 아닌가라는 판단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예수님과 마리아가 보여준 사랑에 참여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해하려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그 일은 정말 무가치한 일이며 아무런 쓸모 없는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방법과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지냈지만 예수님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결코 사랑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배반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가장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보다, ~이 중요하다는 판단보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중요했습니다.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차 오르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이끄는대로 그녀는 실천했습니다. 그 일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컸습니다. 그 일로 인해 벌어질 그 다음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 돌출행동이었겠지만 예수님만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오늘 마리아의 모습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차서 그 사랑이 나의 삶을 인도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자신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이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인도하시는 근원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하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시며,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모든 일의 근원이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느님을 통해 드러나고 확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