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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가지와 십자가(성지주일 감사성찬례,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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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가지와 십자가

 

사순절 어느 자매님의 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감사성찬례 중 사도신경을 합송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시고’라는 대목이 나오자 4살배기 딸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아 당기면서 “엄마!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셨어”라고 물는 것입니다. 당황한 엄마는 “어,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라고 귓속말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에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딸 아이는 “왜? 왜 미워했는데?”라고 더 큰소리로 묻는 바람에 당황한 엄마는 “성찬례가 끝나고 말해줄게”라고 겨우 달래, 성찬례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손짓을 해가며 “근대, 엄마 사람들이 예수님 손이랑 발이랑 이마에 망치로 이렇게 두드렸어!” 라고 묻습니다. 하는 짓이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 있는데 아이가 말합니다.

“근대, 엄마, 예수님한테 뽀로로 반창고 붙어 주면 나으실 거야! 그치”

엄마는 잠시 그 말에 감동합니다. 아이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뽀로로 반창고를 예수님에게 선뜻 붙여 드리겠다고 하는데,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순시기에 묵상거리를 주었다고 고백이었습니다.

오늘은 주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오늘의 전례는 성지나무가지 축성과 순행예식 그리고 수난복음을 중심으로 한 감사성찬례,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전례를 바치면서 어린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내 작은 마음을 드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먼저 성지가지와 나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뭇가지를 들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순행하는 전례를 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지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던 행동을 재연했던 것입니다.

성지와 나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성지는 희망, 생명,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사람들은 그 희망과 생명과 승리를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군마를 탄 왕이 아니라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나귀는 말과는 달리 전쟁터를 달리 않습니다. 나귀는 죽을 때가지 자신을 바쳐 남을 위해 밭을 갈고 씨를 심고, 우리가 져야할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나귀처럼 온유와 겸손을 통해 이 세상에 평화 생명을 주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평화와 참된 생명은 다른 사람들과 싸워 승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호산나! 찬미 받으소서!” 라고 외치며 성지가지를 흔들고 옷을 깔며 환영했던 것입니다. 이런 환영은 우리의 삶속에서 외쳐야할 삶의 진리입니다.

이 첫 번째 전례가 끝나면 곧이어 주님의 수난복음과 미사가 봉헌되는 두 번째 전례로 이어집니다.

그토록 열렬히 환영했던 그 군중들의 상황이 돌변해서 빌라도에게 몰려갑니다. 그리고 관례대로 죄수 하나를 풀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예수”를 풀어달라고 요구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사제의 선동에 넘어간 군중들은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돌변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라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지주일의 전례는 하느님을 찬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오늘 군중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삶과 주님을 배반하는 하는 삶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사람들이 주님을 버릴 지라도 결코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 했지만 닭이 울기 전에 결국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수 없이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삶의 현실 속에서 언제나 주님을 등지고 사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약한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배반한 두 가지 유형이 나옵니다.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한 배반은 죽음에 이르게 했고, 또 한 배반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성경은 유다가 빵을 받은 뒤에 밖으로 나갔는데 그 때는 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어둠을 향해 가는 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시점은 새벽닭이 울 때였습니다.

뭐가 달랐나요. 배반의 시점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배반으로 밤을 향해 갔고, 한 사람은 배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약합니다.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면서 어느 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입술에 침도 마르기 전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어쩌면 바로 오늘 내 자신입니다. 그러나 그 배반이 어둠이 아니라 새벽이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처럼 나약한 우리들이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르완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년 전 르완다에서는 대 학살이 있었습니다.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이 전용기 격추 사고로 숨지자, 100여 일 동안 투치족의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80만 명 이상을 학살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학살을 저지른 후투족이 사죄를 하고, 이를 용서하는 민족 화합을 통해 지금은 국민 총생산량이 10배에 달하는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게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유다에게는 회개가 없었지만, 베드로에게는 회개가 있었습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회개가 없는 배반은 어둠 속에 머물게 하지만, 회개가 있는 배반은 새벽을 맞이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새벽이 오기 전에는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새벽닭이 울 때는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그 나약함을 넘어, 두려움을 넘어, 이제는 담대하게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 바쳤던 쳤던 것입니다.

 

도종환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거듭나겠다는 것은 죽음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겠다는 것은 내 살을 깎아내며 피를 흘리겠다는 것입니다. 내 안과 내 밖의 거짓된 것들과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성지가지를 십자가 위에 걸어둡니다. 그것은 회개의 은총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지만 그래서 주님을 배반했지만, 돌아 설 수만 있다면 주님은 회개하는 나를 받아주시고, 기뻐하신 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지주일의 전례는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배반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지만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상황에 따라 우리는 변했지만 주님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이사50:6)고 하신 이사야의 말씀처럼,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까지도 저주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성지주일 전례를 행하면서 끝까지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넘어진 나에게 일어나라고 손을 내미십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달아나 버린 나를 행해 여전히 손짓하며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지켜주는 성이 되어 주리라, 내가 너를 살리리라. 나에게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나약하여 쉽게 변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이게 오늘 전례의 핵심입니다.

 

오늘 성지가지는 다음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까지 십자가 고상위에 걸어둡니다. 주님을 그토록 환영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는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나를 주님은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성지가지를 걸어두고 언제나 보십시오. 배반하는 내 자신과 그런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결국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언제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승리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