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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이것은 나의 살과 피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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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의 살과 피 (上)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고전 11,23-26: 23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넘겨받은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넘겨지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24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는 여러분을 위해 주는 내 몸입니다. 나의 기억으로 이를 행하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5또 그와 같이 식후에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피로 맺는 새 계약입니다. 여러분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26사실 그분이 오실 때까지,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일세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마지막 가던 길을 하나하나 기억해 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당하게 입성하던 모습에서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까지,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도하던 모습에서 영광의 부활까지. 그 중에서도 특히 최후만찬에서 한 예수님의 언행은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것이었다. 그 속에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예수님의 최후만찬이 갖는 원초적 의미를 들여다보고(1), 이어서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성찬문인 고전 11,23-26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텐데, 교회의 공식적인 성찬문이자 성찬이 유다세계를 넘어 헬라세계로 나아가면서 어떤 변화를 맞았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2). 다음으로 성찬의 의미를 교회사 관점에서 들여다보고(3-5) 마지막으로 해석학적 반성을 시도할 것이다(6).

1. 예수님의 최후만찬[1]

Leonardo da Vinci (1452-1519) - The Last Supper (1495-1498)

최후만찬의 순서는 일반적인 유다식 만찬 순서를 따랐고 만찬의 주례는 예수님이었다. 만찬을 나눈 지 하루도 못되어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후만찬의 순서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전식으로 예수님이 잔을 들고 찬양의 말을 함 ② 중식으로 예수님이 빵을 들고 찬양의 말을 한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줌(고전 11,23-24). 이 찬양의 말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뜻도 포함되므로 바울은 ‘감사하다’(유카리스테사스)라는 표현을 썼다. ③ 후식으로 예수님은 잔을 들고 찬양한 다음 제자들에게 잔을 돌림. 제자들은 돌아가며 그 잔을 마심(고전 11,25). 이처럼 예수님은 전식, 중식, 후식으로 이어지는 유다인의 일반적인 공동식사 관습에 따라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나누었다. 독특한 점이 있었다면 이 때 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빵을 나누며 하신 말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며 “이는 (여러분을 위해 주는) 내 몸입니다.”라는 말씀을 했다. 하지만 이는 헬라어식 표현이고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환원하면 ‘입니다’라는 서술 형용사 없이 그저 “이는 내 몸”이 된다. 그리고 유다인은 사물의 한 부분을 이용해 사물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제유법提喩法을 즐겨 사용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 말씀은 곧 “받으시오, 이는 나의 전부”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최후만찬 자리에서 곧 들이닥칠 자신의 운명을 이미 내다보았고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식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며 예수님은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하는데, 틀림없이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준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잔을 돌리며 하신 말씀: 제자들과 빵을 나눈 예수님은 이어서 잔을 돌리며 “이 잔은 피(로 맺는 새 계약)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피에는 생명이 녹아들어가 있다고 간주했기에 피를 마시는 일을 금지했다(창세 9,14;레위 17,10이하). 따라서 유다 땅에서 치러진 최후만찬에서는 ‘피’보다는 ‘잔’이라는 표현이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이는 (내) 피”란 마치 “이는 내 몸”이 ‘나의 전부’를 뜻하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다는 말의 상징적 표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붉은 포도주가 든 잔을 돌리면서 곧 들이닥칠 죽음에서 처참하게 피를 흘리리라는 사실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교회들 중의 하나인 고린도교회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편지들을 썼다. 이 문제들 중의 하나가 고린도교회의 성찬 관행이었다. 성찬에 교인이랍시고 참가한 이들이 각자의 허기만 허겁지겁 채우느라 종종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술에 취한 사람이 등장할 정도로 질서를 잃었다는 소식이었다(고전 11,20-22). 이에 바울은 성찬을 어떻게 지내야 옳은지, 예수님 자신이 세운 성찬의 모범을 제시한다(고전 11,23-26).

23ㄱ절에서 바울은 따라 나오는 성찬문 전승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 즉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생긴 일을 곧이곧대로 담고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23ㄴ-24절은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이 빵을 나누고, 그때 한 말씀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여러분을 위해”는 바울의 첨가문이다. 이는 후에 대속죄代贖罪 사상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제 몫을 톡톡히 담당한다.

24절에서 중요한 구절은 “나의 기억으로”이다. 이 말은 유다 문화권에서 따왔다는 주장과 헬라 문화권의 정서를 반영한다는 주장으로 의견이 나뉘는데, 후자에 따르면, “나의 기억으로”가 그리스의 전통적인 ‘기념축제’(아남네시스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헬라 문화권으로 도약해 나간 일세기 교회의 첨가문이라는 말이다. 헬라 세계에서는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기념의 만찬을 나누곤 했다. 따라서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기리는 모습,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번번이 새로워지는 일을 두고 자신들의 실생활에 친밀한 ‘기념축제’를 연상해냈을 것이다.

25절에서 눈에 띄는 구절은 “새 계약”과 “마실 때마다”이다. 각각 구약의 계약사상과 반복실행 명령을 내포한다. 우선 ‘새 계약’은 예레 31,31에서 따온 것으로 구약의 잘 알려진 모티브들 중 하나이다. 장차 맺어질 새 계약은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질서를 반영하며, 마음에 새겨져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예레 31,33.34). “마실 때마다”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마음으로부터 확신한 일세기 교회에서 부활의 의미를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급시켜 투사한 것이다. 즉, 예수님을 기리기 위한 성찬이 매주 행해지면서 획득된 ‘반복’이라는 성격이, 이제 거꾸로 예수님의 입에 담겨져 일세기 교회에서 ‘반복실행 명령’으로 정착된 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질서를 그의 죽음(피)을 통해 완성하신 분으로 새 계약을 세우기 위해 죽음을 자청한 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을 반복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늘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26절은 선교라는 맥락에서 덧붙여진 바울의 개인 의견이다. “그분이 오실 때까지”는 예수님 재림의 날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궁극적 구원의 실현이라는 종말론적인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던 일세기 교회의 소망이 담겨있다.

고전 11,23-25의 성찬문은 분명 바울이 일세기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따왔을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최후만찬에 대한 보도가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은, 그분의 재림 때까지(26절) 성찬을 반복해야한다(24.25절)는 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바울이 교회 시대를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그의 재림에서 막을 내리는 한시적 시간대로 보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오실 때까지” 쉬지 말고 성찬을 행하여 기억을 언제나 새롭게 가다듬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그분의 죽음이 갖는 뜻을 전파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의 성찬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사聖事로 자리 잡는 것이다. 향후 이천년을 살아 숨 쉬게 될 성체성사가 탄생한 위대한 시대였다.

3. 도대체 어떤 종교이기에?

기원후 112년경 로마의 속주 비티니아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 플리니우스 2세는 트라야누스 황제(98-117)에게 편지를 보냈다. 비티니아에서 골머리를 앓게 만들던 자들을 처리하는 데 지침을 내려달라는 편지였다. 그는 문제를 유발시키는 자들을 거론하면서 한 가지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나는 그들에게서 괴팍스럽고 극단적인 미신 밖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사를 연기하고 당신의 조언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충직한 총독으로서 최선을 다해 사안을 조사했으며 그 마지막 결정도 황제가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노련미 넘치는 관리의 모습이다.

그 편지 중에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관해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온다. “그들은 정한 날 해돋이 전에 모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성가를 부르며 찬송하고, 또 어떤 범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그러고는 그들은 보통 다시 헤어졌고, 그 후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모였으나 그것은 죄 없는 완전히 평범한 식사였다고 합니다.”[2] 틀림없이 플리니우스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예배에 정보원을 잠입시켰을 테고, 정보에 의거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죄 없는 완전히 평범한 식사’(cibum, promiscuum tamen et innoxium)! 이는 분명 성찬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죄 없음과 평범함을 강조했을까?

고대 지중해 권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었고 나름대로의 종교의식을 갖고 있었다. 로마 세계에서 널리 행해지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제물(동물, 간혹 인간)을 바치고 그것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믿음이 발견된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미트렌 밀교密敎에서는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들만 종교의식에 참여해, 이른바 ‘거룩한 식사’를 나누곤 했다.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의식 두 가지만 들어도 우리는 손쉽게 주변에서 성찬을 바라보던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차별성을 가진 집단(세례 받은 이들)이 매주 따로 모여 식사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사도 11,26; 1베드 4,16) 그들은 빵과 포도주를 먹으면서 교주의 피와 살이라고 한다더라.”

로마인들은 종교의 목적을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제사 중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인육을 취하는 행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종교이기에 감히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힌단 말인가? 그런 자들은 철저하게 색출해 따끔하게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음회에 계속

  1. ^1,2 항의 자세한 분석은, 박태식의 『예수와 교회』(우리신학연구소 1999) 109-147쪽을 참조하시오.
  2. ^ 『플리니우스 편지』 2장 7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