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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요일: 요한 12: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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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여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2년에 나온 영화인데 괴기스럽고 약간은 이상한 영화입니다.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약을 먹게되었는데 그 약은 젊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영원히 죽지 못하는 약이었습니다. 두 명의 여주인공은 영원한 젊음과 미모를 위해 이 약을 먹었지만 결국 가장 추한 모습으로 죽을수도 없는 영원한 고통 속에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자체가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죽어야 사는 여자라니,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제가 작년 1월에 발령을 이곳으로 받으면서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구절이었는데 오늘 설교를 위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씨앗을 심고 식물을 키울 때,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을 잘 자랐다, 잘 살았다고 표현하고 반대로 싹이 나지 않거나 중간에 시들어 버리는 경우에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 다음 구절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역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삶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해 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양식을 사기 위해서, 안락한 집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또 열심히 일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삶을 역설적이게도 “죽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이다. 왜 삶이 죽음이라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일까요?
 
말씀을 묵상하며 진정한 삶은 바로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를 실현하지 못하고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몇 해전 뉴스에서 몇 천년이 지난 씨앗을 발견했고 과학의 힘으로 그 씨앗을 싹틔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씨앗이 몇천년이나 존재했지만 죽은 것일까요? 아니면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씨앗이 자신의 존재를 실현했다면 씨앗은 사라졌겠지만 울창한 숲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나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질문을 좀 쉽게 바꾸어 본다면 세 가지 질문으로 늘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참 많은 대답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이 대답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나는 결국 죽고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나는 지금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누리며 살고 있고 결국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주 기본적인 대답입니다. 이 대답들이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 될 때, 다양한 삶의 모습이 가능합니다. 각자가 받은 다양한 소명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듯이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하느님 안에서 나의 존재의 참 의리를 깨달아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결국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워내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딱딱한 씨앗의 껍질을 깨부수는 일 없이는 결코 생명을 꽃 피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껍질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무엇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까? 또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주저하게 합니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성주간을 통해 여러분을 주저하게 하고 여러분을 방해하는 그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여쭈어 보시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딱딱한 껍데기 중 강력한 것 하나는 바로 두려움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친구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집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세상의 인정을 보장해주는 다양한 증명서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자 기반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오직 “하느님”뿐이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것이 없더라도 우리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 사순 첫 째날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사순 1주일의 복음을 기억합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것을 이겨내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 하느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삶의 자리로,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이미 이 자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존재를 실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면 되지 왜 생명을 주시고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그것도 주셨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바꾸어 말하면 왜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를 지시고 처참하게 수난을 당해야 했는가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우리가 이 고난주간을 보내며 부활을 맞이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왜 밀알이 먼저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생명력의 경이로움을 경험합니다. 작년 텃밭을 분양하고 그것을 직접 관리하면서 뽑아도 뽑아도 생겨나는 잡초를 통해서, 흙이라곤 한 줌 뿐인 바위산에 고고히 서 있는 나무의 멋진 사진 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작은 화분안에서 싱싱하게 살아있는 나무 속에서 우리는 생명력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정확한 그 때 어미가 부리로 그 알을 쪼아 준다는 것입니다. 미리 알을 쪼아서 도와주면 그 병아리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껍질을 우리는 깨고 나가야 합니다. 아무런 수난 없이 주어지는 생명은 그 힘이 크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딲딱한 껍질을 뚫고 나갈 때, 거친 세상 속에서도 결코 죽지 않고 찬란하게 그 생명을 꽃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소명과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믿어서 이제는 우리의 존재의 실현을 가로막는 거짓된 모습을 포기하고 버림으로써, 결국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의 아픔을 동정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처절하게 죽어야 할 거짓 내가 죽지 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 곧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시는 하느님을 믿으심으로 여러분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빛이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느님 앞에 시로 고백했습니다. 잘 아시는 시편 23편은 늘 평안하고 복된 길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