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너도 엄마가 있니?

[세명의 엄마]너도 엄마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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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의 엄마]너도 엄마가 있니?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어머니

이 세상에 어머니 이야기처럼 심금을 울리는 소재가 또 있을까? 어머니 하면 우선 떠오르는 개념은 숭고한 희생정신, 무한한 사랑, 자애로움과 용서 등이다. 물론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벽한 어머니 개념을 현실에서 구현해내야 하는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희생정신이니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말이 큰 부담으로 다가 올 수 있다. 아무리 자식 사랑이 어머니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마치 판매기에서 커피를 빼먹듯이 ‘어머니!’하고 부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획득할 수 있는 가치들이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종교로 흔히 그리스도교를 꼽는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사랑의 종교’라 불리기도 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인데, 사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말씀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랑하시오’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미래형 동사(아가파세이스)로 쓰였지만 문법적으로는 명령법 범주에 집어넣는다. ‘너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것이다.’가 실은 대상자(너)의 미래를 규정하기 말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칸트는 이웃사랑을 강조한 예수님의 말씀을 일종의 의무로 이해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정한 목적이나 의도 없이 그저 ‘사랑하라’고 명령한다면 이 명령이 절대적 의무감을 내포하는 것이지 결코 단순한 성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단순하게 말해, 자비심이 특별히 강한 사람(이를테면, 테레사 수녀)이나 특별하게 잔인한 사람(이를테면, 연쇄살인범)을 염두에 따로 두고 한 말씀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라도 해당하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흔히 ‘정언定言 명령’이라 부른다. 글이 조금 어려워졌다. 필자의 의도와 많이 어긋나게 나갔다.

우리들의 주제로 다시 돌아와 보자. 어머니의 사랑은 전적으로 누구도 간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인된 자발성에 근거할까, 아니면 사회적 의무감에 기초를 두었을까? 바로 그게 필자가 궁금한 점이다.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어머니의 사랑을 다룬 영화 몇 개를 살펴보자.

마더 – 숨기면 돼!

봉준호 감독이 오랜만에 ‘마더’(극영화, 한국, 2009년, 128분)라는 영화를 갖고 돌아왔다. 원래 제목은 ‘엄마’였는데 이미 동명의 영화와 드라마가 있어 ‘마더’라는 영어표현 빌려왔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형편에서 붙여진 제목이라는 뜻인데, 아무튼 결과는 절묘했다. 어머니에 대해 무엇인가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을 알려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니 말이다. 특히,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 도준(원빈)이 엄마 혜자(김혜자)에게 침통을 건네 줄 때 감독이 배우에게 요구했다는 지문을 알고 나선 머리카락이 쭈뼛하는 느낌이었다. 그 장면에서 김혜자가 지었던 표정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과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라는 지문을 소화해낼 수 있는 여배우로 누가 있을까? 아마 김혜자 외엔 없을 것이다. 훗날의 전도연이라면 혹 모를까?

‘마더’는 한마디로 별난 영화다. 지적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평생을 살아야하는 엄마. 그녀에게 아들이란 훌륭하게 키워 장차 큰 덕을 보겠다거나, 왠지 씩씩하고 늠름해서 그 뒷모습만 봐도 안도감이 느껴지는 따위와 거리가 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세끼 밥 먹고 살아남도록 지켜내야 하는 가련한 존재인 것이다. 손톱발톱을 날카롭게 세워 보호해야 할 대상. 그러니 새끼를 향한 어미의 ‘동물적인 사랑’이라고 감독이 표현할밖에…….

이런 어머니를 묘사하는데 감독이 사용한 도구들이 화려하다.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느라 작두질을 할 때 엄마는 종종 손끝이 베인다. 엄마의 표정을 클로즈업한 상태에서 서걱서걱 작두소리는 다가오고……. 소름끼치는 엄마의 집중력이다. 상황이 아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엄마는 순식간에 살인을 저지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또한 아들이 죽인 소녀의 장례식장에서 엄마가 눈을 부라리며 싸움판을 벌이는 것 하며, 이런 저런 표정과 몸짓과 소리로만 관객을 녹여버리는 엄마의 솜씨가 대단했다. 그리고 엄마의 난데없는 춤사위로 시작된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유가 밝혀진다.

조연들이 여럿 등장하기는 하는데,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쇠를 갖고 있는 듯 행동한다. 마치 히치콕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히치콕의 영화에 사실 얼마나 많은 신비한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아무튼 영화 중감쯤부터 조연들의 역할도 그나마 뜸해지더니 엄마 혼자 이야기를 끝까지 끌어나간다. 김혜자는 평소에 연기에 과장이 들어가 있어 못내 안타까웠던 배우였는데 ‘마더’에선 정말 잘 해냈다.

엄마에겐 모든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녀만이 아는 침점이 있다. 넓적다리 중간쯤인데 거기를 세게 자극하면 불행한 기분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점을 아들에게도 알려준다. 그곳을 힘껏 누르면 불행한 기분이 사라진다고. 엄마가 벗어 나고팠던 불행한 기분은 무엇일까? 죄책감? 의무감? 나쁜 기억?

엄마를 통해 인간의 약점을 가능한 한 깊이 있게 파고들어 가려하는 감독의 연출력이 실로 눈부셨다. 덕분에 인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필자에게 만들어졌다. 언젠가 잘 아는 감독 한 분이 ‘마더’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와 비교하면서, 어깨를 나란히 달려가던 두 감독이 이제부터 슬슬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동의한다.

‘마더’는 칸영화제의 비경쟁 부분에 출품되었고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분에 한국의 공식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기대가 많이 된다.

비밀과 거짓말 – 숨기면 안 돼!

비밀 없는 인간은 없다. 딱히 숨길 게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두 가지 비밀 정도는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업무상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속여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비밀과 거짓말’'(Secret and Lies, 마이크 리 감독, 극영화, 영국, 1996년, 135분)이라는 제목의 영화에서는 거짓말이 우리를 어떻게 망쳐놓는지 그 진상眞相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홀로 사는 중년의 여인 신시아(블렌다 블레신)는 가난한 동네에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유일한 피붙이인 남동생 부부로부터도 외면당하고, 하나있는 딸에게마저 무시당하며 살고 있다. 젊은 시절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함부로 살아 어찌어찌 해서 낳은 딸 외에는 정작 장래의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비축해 두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과오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아버지 없이 혼자 키우는 자기 딸로부터도 무시당하기 딱 알맞은 조건이다.

신시아는 진흙탕에 처박혀 있었다. 희망 없이 살아가던 그녀에게 어느 날 꿈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래전에 미혼모 상태에서 낳은 후 친권을 포기했던 아기(홀텐스)가 수소문 끝에 생모를 찾아 전화를 건 것이다. 좋은 가정에 입양된 그 아기는 멀쩡한 직업과 교양을 갖춘 멋진 숙녀로 성장했다. 생모인 신시아에게 홀텐스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눈부신 사람이었다. 신시아가 처음에는 홀텐스를 거부했지만 어느덧 애틋한 어미의 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생기가 살아난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문제가 발생한다. 새롭게 시작된 모녀관계를 어떻게 주변에 설명하는가이다. 진실을 가릴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적당히 얼버무리며 하루하루 살아갈 것인가? 마이크 리 감독은 확실히 전자의 편을 든다. 그는 진실을 가려둘 때 얼마나 큰 불행이 싹틀 수 있는지 보여주려 한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무마하게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잇다보면 인생 자체가 거짓으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거짓말은 중국에 인간을 파괴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에겐 진실만이 살 길이다.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신시아 역을 맡은 블렌다 블레신의 연기는 정말 탁월했다. 하류인생 연기를 어찌나 잘 했는지 ‘오, 그레이스’(2000년)의 그 점잖던 귀부인이 과연 같은 배우인가 혼란이 올 정도였다. 특히, 홀텐스와 처음 만나 카페에서 진실이 밝혀지던 약 10분정도의 연기는 족히 영화사에 기록해둘만한 명장면이었다. 고정시켜놓은 카메라 앞에서 갖가지 감정의 기복을 능수능란하게 표현하는 데 그만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정말 놀라운 배우이다.

블렌다 블레신의 연기에 힘입어 ‘비밀과 거짓말’은 1996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 그리고 1997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정도의 꼬리표라면 독자들이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선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 숨길 게 없어!

어머니의 사랑과 관련해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는 영화를 소개하겠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울루 그루스버드 감독, 극영화, 미국, 1999년, 108분). 영어로는 The deep end of the ocean이라는 다소 난해한 제목이다.

여덟 살 난 형은 언제나 세 살 남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 동생은 왜 또 그리 잘 없어지는지? 어느 날 엄마가 잠깐 동생을 맡고 있으라는 말을 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고 동생은 형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형은 ‘모두 네 책임이야’라면서 잡았던 동생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 뒤로 가족에겐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다.

엄마의 혼이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말았다. 엄마는 단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모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단 한시도 잃은 아들을 맘에서 지우지 못했고 그 상태에서 팔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래도 엄마보다 아빠는 훨씬 나은 편이다. 남성 특유의 강인함과 남은 가족이라도 잘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작용을 한 덕분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로, 아들을 잃은 책임을 전가할 부인이 있지 않은가? 팔 년 동안 아빠는 가정을 깨뜨리지 않고 잘 지켜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다. 잃었던 아들이 문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를 맞아들인 아비의 기쁨을 거기에 비길 수 있을까?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비단 유괴사건 그 자체에 머무는 게 아니라 거기서 빚어지는 가족의 갈등과 유괴되었던 아들이 돌아온 후의 이야기, 그 아들이 그간에 자랐던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영화 속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된 셈이다. 마치 해면에 물을 적시듯이 영화에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베스 역을 맡은 미셀 파이퍼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역할이 있는데, 이리저리 허둥대는 백치미 여인으로 로맨스에 성공하는 연애박사이다. ‘어느 멋진 날’(1996)이나 ‘마피아의 부인’(1988) 등의 영화가 생각난다. 그런데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보인다. 자식을 잃고, 찾고, 다시 포기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극적인 심경 변화를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 한 영화에서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돌아온 아들 역할을 한 벤(라이언 메리멘)은 무엇인가 비밀이 담겨 있는 듯한 얼굴을 갖고 있어 인상에 남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엄마 베스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처참한 운명 앞에서 때론 분노하고 때론 수긍하고 때론 극복해 가면서 살아나간다. 무거운 주제의 영화는 관객에게 부담을 주는 경향이 있다. 괜히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거나 그리 필요하지도 않은 교훈을 주려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제도 자칫 계몽적인 경향으로 흐를 소지가 있었다. 진정한 어머니의 역할을 관객에게 가르치겠다는 태도 말이다. 그런데 훌륭한 결말로 이어져 홀가분한 해방감을 관객에서 선사해 주었다. 훌륭한 시나리오와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셀 파이퍼의 연기력 덕분이다.

한번쯤 꼭 볼만한 영화로 추천한다. 비록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면에 처절한 인간 드라마가 담겨 있어서이다.

세 명의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을 주제로 한 세 편의 영화를 살펴보았다. 김혜자와 블렌다 블레신과 미셀 파이퍼, 세 명의 여배우들은 무척이나 하기 힘든 배역을 실감나게 잘 소화해냈다. 그야말로 볼만했고 머리에 확실한 인상을 남긴 영화들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남자라서 그런지 별 부담 없이 영화를 보았지만 여성들에게는 꽤나 힘든 영화일 수도 있다. 영화의 상황들이 객관화시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무거운 설정이기 때문이다. 지적 장애인 아들, 버렸던 딸, 유괴되었던 아들……. 어느 경우 하나 선뜻 인정하기 어렵지 않은가!

혜자는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였으니 자신의 목숨은 못 내던질까? 윤리의식이라든가, 남들 앞에서 갖춰야 할 교양이라든가, 사회적 책임 따위는 비장애인 아들을 가진 엄마들의 속편한 말 노름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을 지켜내야 한다. ‘마더’에서는 비장미悲壯美 넘치는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

혜자가 산전수전 겪으면서 비장미를 줄기차게 갖추어왔다면 신시아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어머니이다. 그녀에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상황들이 하나 같이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어서 새로 배워야 할 점이 아주 많다. 이는 그녀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하류인생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은 잃었다 새로 만난 딸에게 향하고 있지만 어떻게 가족의 미래를 만들어나가야 할지에 대해선 깜깜했다. 모성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조차 낯설어하는 어머니였다.

혜자나 신시아에 비해 베스는 대단히 수준 높은 어머니다. 세계 최고의 국가인 미국의 중산층이 갖추어야 할 학식과 재산과 배경과 가족과 교양에 두루 익숙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발휘하게 될 어머니 역할에 대한 기대가 영화 첫 장면부터 무척 컸었다. 아니나 다를까? 얄밉도록 완벽한 할리우드식 진행과 결말이 도출되었다. 유괴 사건을 맡았던 여형사(우피 골드버그)가 동성애자라는, 굳이 알 필요 없는 상황까지 제시하면서 말이다.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그만큼 많이 제공하겠다는 감독의 배려일까?

이상적인 어머니 – 보내야 돼!

자발적인 사랑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만은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세 영화를 보고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머니에게도 본능적인 사랑과 대별되는 보편적인 의무와 합리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개인 입장에서 보면 사랑이란 전적으로 나의 감정에 기초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입장에서 보면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어야만 진정한 사랑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것을 포기하더라도 말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결코 저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비록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시간과 타자>라는 책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댐’이 윤리의 근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타자他者’의 얼굴이 ‘나’에게 윤리적 명령을 강요한다는 뜻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사랑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인식할 때, 그리고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존중할 때, 비로소 사랑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사진작가 베스는 팔년 만에 되찾은 아들 벤과 함께 촬영여행을 떠난다. 어느 소녀의 무덤을 촬영 하던 중 벤이 심란한 이야기를 던진다. 다른 가정에서 자라면서 그쪽 아버지와 정이 들었는데, 이제 갑자기 원래 부모가 나타나서 그쪽 아버지와 헤어지라고 강요하니 자기도 몹시 불행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벤은 항변한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하나요?” 거기서 베스가 내린 결정은 벤을 옛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벤을 옛집으로 데려다 주던 날, 베스는 차에서도 내리지도 못한다. 대신에 짐을 갖고 문 뒤로 사라져가는 벤의 뒷모습을 보면서 운전석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베스는 벤과 두 번 헤어졌다. 처음엔 뜻하지 않았던 유괴사건으로, 두 번째는 스스로 결정을 내려 아들을 떠나보냈다. 어떤 이들은 문제가 터졌을 때 평화를 위해 가능한 한 진실을 숨겨두는 게 상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야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어느 쪽이 좋을까? 독일 속담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어리다고 해서 진실을 가려두면 찾아오는 것은 더딘 성장뿐.’ 이상적인 어머니는 자식을 보내야 한다!

이쯤에서 글을 끝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더’에서 영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어 옮겨본다. 혜자는 도준의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갇힌 청년이 누구인지 만나보려 면회를 간다. 그랬더니 그 청년도 다운증후군에 걸린 지적장애인이었다. 혜자가 그에게 던진 유일한 말 한마디는 “너도 엄마가 있니?”였다. 가장 슬픈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한 마디 질문이었다.

필자는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베스를 찾아냈다. 결론을 이미 내렸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왜 굳이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일까?

너도 엄마가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