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기도 나눔 신기호(도미닉) 신부님의 사순절 묵상입니다.

신기호(도미닉) 신부님의 사순절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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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2주 묵상_140320
말 씀: 루가복음 16:19-31
본 문: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 오지도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묵 상:
이 새벽 말씀을 묵상하다, 그 흔한 ‘시간’이라는 개념에 침잠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맞나? 내 안의 의문을 풀기위해 관련 자료를 뒤지다가 오늘은 함께 관련 문서자료를 읽고 그 문서를 깊이 묵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기때문에, 시간에 대해 더욱 깊은 ‘사고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흔한 ‘시간’… 그래서, 그 ‘시간’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님, 그 ‘시간’에 치이고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말씀을 읽으며…’더 늦기 전에…’라는 외침이 내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잠시 ‘시간의 배’에서 내려서 함께 다음 글을 함께 읽어 봅시다. 커피 한 잔 하면서…공간과 시간은 다르겠지만…다음 ‘시간의 배’는 30분 후에 도착예정입니다….^^*
“아 유 레디???” ^^*
자! ‘개념정의’부터 들어 갑니다…
크로노스 Vs. 카이로스, 호라
크로노스(chronos)는 ‘보통의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kairos)는 ‘적절한 순간, 기회(occasion), 올바른 척도’ 등을 뜻한다.
호라(hora)는 ‘하루의 때’를 나타낸다.
“…이러한 시간 이해는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 잔인한 시간인 크로노스와는 다르다. 녹아내리는 달리의 시계와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의 모습은 시간의 허구성과 허무성을 드러내며 인간이 시간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카이로스와 호라의 시간은 인간에게 다가오며, 또한 인간에게 손을 내미는 시간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은 인간이 잡을 수 있는 것 너머에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스에서 기회(occasion)라는 단어가 나온 것처럼, 적절한 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순간이나 기회를 잡으면 잔인한 시간은 언제든지 천사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시간으로 변할 수 있다. 시간은 늘 잔인하거나 늘 천사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본질적인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언제나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언제나 변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역동성을 지닌 하나님의 시간과 만나는 것이다. ‘그토록 오래된 새로운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의 절묘함에 묻어나는 것도 이것이다. 이 표현은 오래되고 일반적인 균질한 시간의 절대성과 역동성을 지닌 비균질적인 새로운 시간의 상대성을 조화시킨다. 이것은 객관성과 주관성, 공공의 현실과 개인의 현실을 하나로 연결한다. 그러므로 이 연결을 통해서 시간의 균질성은 무너지고 그것의 불가역성은 사라진다…”
“…오래된 시간은 뻔하고 진부하며 지루하고 잔인하다. 그것은 언제나 눈을 뜨면 있는 시간이다. 어쩌면 그것은 뉴턴과 칸트의 시간이다. 변하지 않고 완강하게 인간의 삶에 버티고 서 있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새로운 처음으로 경험한 낯선 시간이 된다. 더는 오래되지 않은, 지루하지 않은, 잔인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의 이름은 아름다움이다. 이 새로운 아름다움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기독교의 특징은 분명히 시간에 있다. 시간과 공간이 인간의 삶과 사고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공간을 포기한다.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니라 시간의 종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때’, 즉 카이로스를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 새로운 시간의 선포는 시간의 균질성과 권력의 고정성을 파괴한다. 그것은 잡을 수 없는 시간의 특성을 드러내며 시간과 권력의 연관성을 파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시간을 경험하는 것의 지루함과 잔인함을 넘어서는 카이로스나 호라는 크로노스가 지배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인다…”
“…예수와 그리스도의 만남으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만남으로 새로운 세계가 생성된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합한 정점에 예수의 죽음이 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빛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처럼 그것은 썩음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예수의 상상력은 잔인한 크로노스의 권력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시간의 잔인함을 무너뜨린 예수의 방법이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권력의 포기라는 예수의 길을 그대로 보여준다…”
참고자료: 예수가 상상한 그리스도 : 살림지식총서 281, 김호경, 2007.2.25,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