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가족을 포기하라

[신앙] 가족을 포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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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포기하라


위기의 가족

교수가 직업인 기러기 아빠가 있었다. 두 아이를 미국에 공부시키러 보냈는데 아이들이 어려 부인도 같이 간 경우이다. 아이들이 다행히 공립학교에 들어가 생활비가 적게 드는 편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달에 5백만 원은 보내야 했다. 사실 집값에, 자동차 유지비에, 과외비(미국에서도 과외를 하는 모양이다)에 5백만 원도 빠듯했다. 대학교수 월급으로 매달 거액을 송금하는 일이 불가능해 결국 아파트를 팔아 본가로 들어가고 말았다. 기러기 아빠는 여름방학 때면 가족을 만나러 미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인과 아이들이 아빠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주었으면 했단다. 이미 틀이 잡힌 자기네 생활권에 갑자기 낯선 남자가 끼어 든 꼴이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가족으로부터 따돌림 당한 아빠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미국 교육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한국의 입시지옥으로 다시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년을 방황하던 기러기 아빠는 견디다 못해 아내와 이혼하려 했으나 아내는 거부했다. 아내로서는 이렇다 할 대책도 없는 판에 돈줄이 끊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는 실화이며, 그 내용에 독자들은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십 년 전에 이 이야기를 했다면 ‘아이고, 박 선생님 소설 쓰시네!’라며 고개를 흔들었을 법이다.  
 
이 글은 성서에 나오는 가족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를 통해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보탬되는 바를 찾으려고 씌어졌다. 그러나 성서가 수천 년 전 지중해 권의 문헌인 까닭에 오늘날의 상황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사실 당시에 기러기 아빠가 있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니 성서를 마치 질병에 대한 처방전처럼 사용해서는 안될 일이다. 많은 교인들이 성서를 처방전 취급하는 게 비록 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가족에 대한 직접적․간접적인 언급을 모두 찾아보면 어마어마한 분량이 될 테고, 아무리 솜씨 좋게 줄여본 들 피상적인 관찰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보다는 글의 주제를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좁혀보았다. 몇 주일 동안 글을 구상하면서 여러모로 따져본 결과이다.
    

집안 식구가 원수다
   
예수님 주변에는 출가해서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베드로처럼 고기 잡던 그물을 놓고 즉시 예수를 따라나선 이가 있었던 반면(마르 1,16-18), 가족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망설이던 자들도 종종 있었다. “예수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제가 제 집에 있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루가 9,61) “먼저 제가 물러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루가 9,59)…, 변명이 한없이 늘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냉정하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맞지 않습니다.”(루가 9,62)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시오.”(루가 9,60)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 뚜렷한 예가 십계명의 제 4계명(부모를 공경하라)인데,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앞의 세 계명에 이어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할 계명들 중 처음으로 제시된다. 말하자면 ‘부모 공경’이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으뜸으로 따라야 할 계명이라는 뜻이다. 성서에 보면 자식들의 효성이 잘 드러나는 때는 장례를 치르는 상복 기간이었다. 유대인의 장례 풍습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
 
유대인은 부모가 죽으면 우선 자신의 옷을 찢어 슬픔을 표시하고 마포 옷(상복)으로 갈아입는다. 그 다음에 신을 벗고 얼굴에 수건을 덮어쓰고 수염을 가렸다. 자신의 머리에 흙을 끼얹고 머리를 먼지 속에 처박거나 먼지 속에서 온 몸을 뒹굴기도 했다. 재를 뒤집어쓰는 일을 기본이었으며 심지어 몸에 상처 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모두 부모를 여윈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그 행동들이 너무 지나쳐서인지는 몰라도 신명 14,1에는 “너희는 하느님 야훼의 자녀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몸에 상처를 내거나 삭발을 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등장한다. 과공過恭은 오히려 비례非禮라는 말이다.
 
유대인은 보통 7일장을 치렀고, 장사한 후 7일간 단식을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1사무 31,13). 상복을 입고 지내는 동안에 유족이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곡哭이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커야 했는지 낙타나 늑대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킬 정도여야 했다(미가 1,8). 그러나 아무리 천하의 효자라 하더라도 상복 기간 내내 최고조의 곡소리를 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곡을 전문으로 하는 여인이 필요했고 마을마다 전문 곡꾼이 있었다(루가 7,11-17). 그 직업은 여인의 딸에게까지 전수되었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얼마나 엄격한 장례문화를 가졌는지 능히 알 수 있다. 시신은 동굴에 넣거나 땅에 매장을 했으며 부장품을 넣어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자식된 당연한 도리로 부모의 시신을 멋진 동굴 형 무덤에 모시려 했다.
  
비록 유대인의 장례 풍습을 간단히 정리했지만 독자들은 그들이 가진 효심의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부모 공경을 강조했으면 장례를 앞두고는 매일 기도문(18조 기도문)을 외우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며(『미슈나』, 브라콧 3,1), 부모를 모욕한 자식을 돌로 쳐 죽일 죄인에 포함시키기까지 했을까(『미슈나』, 네찌킨, 산헤드린편)? 그런데 유대 땅에서 나서 유대인으로 자란 정통 유대인인 예수님이 ‘장례’라는 자식의 기본적인 임무마저도 저버리라고 말한 것이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시오.” 당시로서는 여간 놀라운 말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백배로 받을 것이요, 또한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 했고,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밝히면서 “나는 아들은 아버지에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다”(마태 10,35-36)고 했다. 모두 기존의 가족 관계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들인데, 사실 그 정도 되면 비단 유대인의 정서뿐 아니라 우리네 정서에도 크게 어긋난다. 예수님의 파격적인 말씀에 상처받지 않으려면 가족에 대한 그분의 이해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 가족을 거부해야 하는가?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대체로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었는데 병자들은 병에서 낫기 위해, 죄인들은 죄를 벗어버리려, 굶주린 이들은 음식기적의 소문을 듣고 배를 채우려, 그리고 개중에는 예수님의 구수한 이야기 솜씨에 반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종 색다른 의도를 갖고 예수님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일예로 유대교 최고회의인 산헤드린에서 모종의 임무(이를테면,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라는)를 띠고 파견되었음직한 어떤 바리사이는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징표’를 요구했고(마르 8,11),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가진 종교지도자들은 종교적․정치적으로 예민한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 청년 한사람이 찾아왔다(마르 10,17-27).
 
청년은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십계명을 잘 지키면 그것으로 넉넉하다는 충고를 했고, 그 청년은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은 이미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는 답을 했다. 비록 성서에는 나와 있지만 않지만 청년의 대답 후에 잠시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더니 예수님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떨어졌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청년과 예수님 사이에 흘렸던 침묵의 정체를 들춰내 보자.
 
청년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예수님은 아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십계명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불가능한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예수님은 청년을 자세히 살펴보고 청년이 가진 문제점을 즉시 파악했다. 청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재물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세상 포기해도 재물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으며, 만일 재물이 사라지면 청년은 비록 숨을 쉬고 있다고 하나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음’은 아니었다. 그 청년에게는 ‘재물’이 존재의 이유였다는 뜻이다. ‘재물을 포기하라.’ 그 한마디에 청년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섰다고 하니 예수님의 직관은 실로 정확했다는 느낌이 든다.
 
가족을 포기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효자들은 부모에게 발목이 잡혀서 종종 예수님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부모님께 우선 인사부터 해야 한다. 아니 그도 모자라 죽은 부모까지 알뜰하게 섬겨 성대한 장례를 지낸 후에 예수님을 좇겠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가족을 뛰어넘지 않는 한 큰일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언젠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그분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마르 3,20-21.31-25). 예수님이 출가한 후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아 집에 데려가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군중이 워낙 빈틈없이 들어차 있어 도저히 예수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군중 속으로 전갈을 보내 가족이 왔음을 예수에게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 우리네 정서에 따르면 보통 불효자가 아닌 셈이다.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온 어머니를 버선발로 나가서 맞지는 못할지언정, ‘도대체 누가 내 어머니냐?’고 반문을 하다니… 주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의 머리 속엔 즉시 제 4계명이 떠올랐을 것이다. “저 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저버리는 못된 자식이로구나”
 
그러나 뒤이어 예수는 더욱 중요한 말씀을 한다. 그분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 가치를 통해 새로운 가족 관계가 성립되며, 이 관계 앞에서는 혈연이라는 세상 가치도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교우들끼리 서로 형제니, 자매니 부를 수 있는 기틀을 이미 이천 년 전 역사의 예수님이 마련해준 셈이다.
 
   
포기하면 얻는다
   
우리는 앞 절에서 ‘가족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 앞에서 내려야 할 실존적인 결단의 요구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사람은 존재 이유를 종종 자기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부자는 끊임없는 재산 불리기에서, 정치가는 부단 없는 권력 노름에서, 운동선수는 한계에 대한 도전 정신에서, 학자는 쉴 새 없는 논문발표에서, 부모는 끝 간 데 모르는 자식 사랑에서, 그리고 효자는 지치지 않는 부모 공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사기를 당해 길거리에 나앉고, 공천 못 받아 낙동강 오리알 처지가 되고, 다리가 부러져 평생 의자나 지키고, 신진 학자들의 추월로 뒷전에 밀려나고,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결혼을 하자마자 부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믿었던 부모가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바람에 자식들은 닭 쫓던 강아지 신세가 되고 만다.
 
한 세상 그렇게 정신없이 좇아서 다니다 보면 인간이란 결국 빈껍데기만 남기 마련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 그 사람이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대상을 정확히 지적해 ‘포기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날 한국의 가정을 두고 충고를 할까? 어디선가 읽을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열두 살 난 여자아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친구가 오기로 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고 늑장을 부리자 심통이 난 것이었다. 그 아이는 온 집안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보다 못한 아빠가 아이에게 책 한 권과 담요 한 장과 사과 한 알을 들린 채 차를 타고 나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저녁때 데려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이는 담요와 책과 사과를 골짜기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발길질을 해대며 자신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 점심때가 다가오자 배가 고파 사과를 집어던진 골짜기로 내려갔다. 사과와 담요와 책을 주워 올라와 보니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 왔다. 가지가 넓게 뻗은 멋진 소나무였다. 나는 소나무 그늘에 담요를 깔고 누워 사과를 먹기 시작했다. 마음가짐이 달리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나는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연이 어머니처럼 나를 평안하게 감싸주며 다독거리는 듯했다. 그 때 하느님을 생각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고독한 시간이 기도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느낌이 있는 이야기>, F. 미할릭 엮음, 성찬성 옮김, 열린, 2003년, 130쪽)
 

저녁때 돌아온 아버지는 딸이 변했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다. 자식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자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 넘치는 가족을 제삼 제사 강조해도 부족한 마당에 엉뚱하게 ‘가족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꺼내들었다. 출가한 수도자들이야 귀가 솔깃할지 모르지만 필자처럼 가족 없이 못 사는 사람에게는 저주처럼 들리는 말씀이다. 사실 우리 같이 약한 평신도가 어떻게 가족이라는 틀에서 초연히 벗어날 수 있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준비하면서 생각을 약간 달리하게 되었다.
 
세계 어디에도 우리나라에서처럼 자식 사랑과 부모사랑이 끔찍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 ‘사랑’이 종종 눈 먼 것처럼 보인다. 가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반드시 화를 불러오고 만다. 귀한 자식일수록 험하게 키우고 부모가 자식의 앞길을 막아서면 안 되는 법이다. ‘가족을 포기하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아마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은 계획하지만 하느님은 비웃으신다.’ (박태식 신부 / 홀리넷 함께사는 세상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