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나는 누구인가?

[신앙]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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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에게 아브라함은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 16,29-31)

법정스님의 화두

   
법정스님이 입적하시자 온 나라에 무소유 열풍이 일더니 급기야 유고집을 출판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만일 출판한다면 그 수익금을 어찌 사용해야 하나? 로 문제가 번져나갔다. 유고집 출판 문제가 대충 마무리될 즈음 천안함 사태가 터졌고 정부 발표에 따라 국가가 우왕좌왕하다 보니 어느덧 스님은 우리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진정 당신이 원했던 대로, 아무런 남김없이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이었다.  
   
잘 아는 기자 출신 한 분이 잡지사에 있을 적에 법정스님의 원고담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잡지사에 원고가 도착하면 스님은 곧 전화를 걸어 언제쯤 원고료가 나오는지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도대체 스님이라는 분이 왜 이리 돈을 밝히지?’라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다. 결국 스님이 후원하던 학생들의 학자금 재촉 전화라는 내막이 밝혀지면서 스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취재차 송광사에 들렀다가 받은 식사 대접과 불일암의 여러 가지 추억담까지 곁들어 접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법정은 깊이 존경할만한 분이었다.
   
법정스님은 선사였다. 산사에 틀어박혀 조용히 도를 닦는 분이라는 뜻인데, 그런 분은 으레 평생 씨름하는 화두가 하나 있기 마련이다. 스님의 화두는 의외로 간단해 그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짤막한 질문이었다. 어느 고승의 화두처럼 난해한 사자성어도 아니고, 논리를 파괴하겠다며 내던진 뜬금없는 부조리 언어도 아니었다. 그저 달랑, 나는 누구인가?
  
스님은 아마 이 질문을 매일 아침 자신에게 던졌을 것이다. 아니, 살아 숨 쉬는 매순간 같은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을지 모른다. 그리곤 대답했겠지. ‘무소유로 가리라!’
  
모든 질문에는 대답이 뒤따르고, 그 대답에 책임질 수 있을 때 주어진 질문이 화두로서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똑같이 내뱉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부자 청년 이야기(마르 10,17-27)

  
부자 청년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받고 싶었다. 어느 날 갈릴래아에서 오셨다는 사람의 소문을 들었는데 사람들에게 곧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세리와 창녀와 병자 등 천벌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구원받은 이의 대열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613가지나 되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율법 규정을 하나하나 다 지켜야 하고 혹시 죄를 지은 경우 속죄의 제사를 바쳐야했다. 말이 좋아 속죄의 제사지,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랴, 비싼 제물을 사랴, 제기를 준비하랴, 사제들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랴, 이만저만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게 돈과 시간과 노력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는 모든 이들에게 공짜로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지 않는가!
    
청년은 당연히 좋은 옷 갖춰 입고 예수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그 사람이 부자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볼 밖에. 그는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예를 갖춰 무릎까지 꿇고 여쭈어보았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르 10,17) 비록 이 질문은 청년에겐 개인적이었을 지 몰라도 실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제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예수님은 십계명의 4,5,6 계명, 즉 인간 섬김을 강조한다. 그런데 청년은 예수님의 대답을 과소평가한 듯했다.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그 계명들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는 답을 하지 않았는가. 비록 본문엔 나오지 않지만 청년의 거리낌 없는 대답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더니 예수님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떨어졌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예수님은 청년에게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를 도우라고 말씀했다. 하지만 이 요구는 재산의 쓰임새와 관련된 결과를 보여줄 뿐이고 실제로는 부자청년에게 사유재산권의 포기, 즉 재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산의 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강조했다. 청년에게는 당연히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고 그 말씀 한마디에 그만 수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섰고 말았다. 모든 부자에게 사유재산이란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슬프게 돌아서는 청년이 뒤 꼭지에 대고 하신 말씀이 저 유명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25절)이다.
   

나는 누구인가?

   
신약 성서에 또 한사람의 부자가 나온다. “어느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루가 16,19-31)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날 때부터 부자였는지, 아니면 열심히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는지 모르나, 아무튼 그 부잣집 문간에는 나자로라는 이름의 거지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아마 매일 아침 같은 자리로 출근했을 것이다. 부자의 자비심과 호의를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는 상황을 미리 짐작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로 끝까지 읽어보고 내용을 한참 숙고해 보아야 그나마 해석의 실마리가 잡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비유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다. 부자는 지옥에 가고 나라로는 천당에 간 후 빚어지는 비극적인 장면 말이다. 지옥 불에 시달리던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제발 죽었다 부활한 이들을 자신의 친지에게 보내 지옥의 참상을 현장감 넘치게 묘사해 달라고, 그래서 나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그 말을 들으면 저들이 반드시 회개할 것이라고. 그러나 아브라함은 냉정하게 거절한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죽은 이가 돌아가 충격적인 말로 지옥을 증언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말씀은 전적으로 새겨들을 만하다. 잠시 멈추어 서서 세상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많은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대로 굳이 모세 시대로 돌아 갈 필요조차 없다. 현대의 성인들로 추앙받는 마더 테레사, 도로시 데이, 돔 헬더 까마라, 막시밀리안 꼴베, 헨리 나우엔, 디트리히 본 훼퍼,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종교적인 인물 말고도 주변에서 본받을 만한 분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추측컨대, 신부님들과 교우들 중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증거들은 예나 이제나 차고도 넘친다. 아예 거기에 ‘국경없는 의사회’도 하나 보태볼까?
    
부자와 그의 후손과 친구들에게도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정작 문제는 다 알면서도 이리저리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만 죽고 만다는 데 있다. 영국의 풍자문학가 버나드 쇼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살아 숨 쉬는 매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철저히 따져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공포와 무관심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시시피 주에 가 남부의 백인 유지들 앞에서 연설한 적이 있었다. 흑인이 동등한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에 동참해 달라는 호소였는데, 한 부분만 옮겨 보겠다.
 
남부는 큰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남부에는 선한 의지를 가진 백인들이 수없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동도 아직은 불분명합니다.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도 아직은 눈에 안 띕니다. 이 수백만의 백인들에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용기 있는 발언을 하라는 요청입니다. 이 시대는 그들의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기록할 것입니다. 지금의 사회변혁 시기에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이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흉악한 말이나 폭력적인 행동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침묵과 무관심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 세대는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비극은 어둠의 자녀들의 악한 말과 행동뿐 아니라 빛의 자녀들의 공포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어느 부자도 아마 다음과 같은 변명을 할 것이다. 나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 결과 큰 집과 별장을 구입했고, 멋진 차를 샀고, 자식들을 유학 보냈고, 말년에는 아내와 함께 대서양 크루즈 여행을 할 참이다. 평생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약자에 대한 침묵과 무관심도 심판받기에 알맞은 죄라고 말씀한다. 무소유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빈티만 날 뿐이다. 무소유가 일구어내는 가치가 중요하다. 거지 나자로에게 무관심했던 부자는 지옥에 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