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너는 나를 따라라

[신앙] 너는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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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라라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9,59-60)  

   
기도는 나의 힘  
   
언젠가 목사님 한분이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말씀 해주신 적이 있었다. 딱 보니 신부라는 사람이 기도생활이라곤 전혀 하지 않게 생겼는지 따끔한 충고를 하신 것이었다. 그런 경우는 그저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목사님 기대에 부응하여 기도생활을 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무엇인가 부아가 치밀었나보다. 그만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안 들어 주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디다!’라는 이상한 답변을 하고 말았다. 이 몹쓸 놈의 자존심이 항상 문제다.
   
의외의 답에 적이 당황하신 듯 목사님은 목소리 톤을 높여 기도의 능력을 다시 한 번 강조하셨다. 그리고 몇 가지 예를 드셨는데 나는 즉시 반론을 제기했다. 이를테면, 갑작스레 한파가 몰아닥쳐 노숙자들이 집단으로 동사하지 않길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시느냐? 예상 못한 쓰나미로 죄 없는 어린 목숨들이 희생되지 않길 얼마나 빌었는지 아시느냐? 아프리카의 재앙으로 불리는 에이즈가 완전히 이 땅에서 사라지길 얼마나 간청했는지 아시느냐? 지구에서 핵무기가 모두 녹슬어 없어지길 나처럼 바라는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 그런데 단 하나도 하느님이 들어주시지 않더라. 그런데 목사님이 예로든 기도라는 게 그저 병이 낫거나, 승진하거나, 아들이 서울대에 들어가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것 아닌가?
  
만일 그렇게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만한 소원만 기도하면,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추구하는 기도만 하면 결국 내 뜻을 관철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압력을 넣는 꼴 아닌가? 왜 하느님은 지구 평화와 인류 안전을 바라는 나의 숭고한 기도는 외면하시고 암세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목사님의 이기적인 기도는 들어주시는가? 나는 그 점이 대단히 궁금하다.   
   
융단폭격과 같은 반격을 받자 목사님도 무엇인가 장광설을 늘어놓으셨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자기 말은 기억하지만 남의 말은 쉽게 잊는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 때문일 것이다. 필경 그 목사님도 당신이 하신 말씀만 기억하시겠지…….
   

윤리적인 종교

   
그리스도교는 대단히 윤리적인 종교다. 그래서 세상만사에 선과 악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아 언제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은 모순과 불의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이라는 개념설정에 익숙하게 만든다. 그에 따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과 정의를 위해 기꺼이 투신하고 심지어 목숨을 바쳐 순교자의 길을 걷기도 한다. 덕분에 인류의 조건이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큰 불의를 낳았던 노예 제도가 사라졌고, 무작정 무시당했던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고, 인종갈등의 원산지인 미국에 흑인 대통령까지 등장했다. 불과 일이백년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있었던 인권 신장이다. 모두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전혀 예상 못한 재해가 덮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과연 이런 참사가 있을 수 있을까? 성서에 떡하니 쓰여 있기를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재해가 닥치면 순식간에 정의는 사라지고 가장 기본적인 인권마저 처참히 짓밟히지 않는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게 취미인 사람들은 이 기회에 큰 소리를 내며 교회를 비웃을 것이다. “아마 하느님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일랑 접어두고 인생을 즐기시오.”(영국 버스 광고),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하는 하느님을 상상할 수 없다.”(A. 아인슈타인) 그리고 일정 부분, 교회는 그런 비판을 수용해야만 한다.

아이티의 불행

   
아이티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진도 7.0의 지진에 기록적인 피해가 잇따랐다. 2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고 그 중에는 당연히 어린 생명들도 포함된다. 지진으로 인한 죽음은 불가항력이었다 하더라도 시신 수만 구가 길거리에 방치되고, 약품과 물이 턱없이 부족하고, 시민들은 폭도로 변하고, 미국 군인들이 들어가 대통령궁을 접수해 치안을 겨우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진을 겪고 난 이후의 상황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끝도 안 보이는 이재민의 행렬이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고 부모 잃은 어린이들은 유럽과 미국 등지에 입양되어 나가고 있다. 향후 수 십 년간 도저히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경제는 초토화 되었고 정치적인 상황마저 극도로 어지러워졌다. 지진의 파괴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나라 하나가 송두리째 파괴된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희망의 기운마저 빼앗긴 처참한 상황에 대해 교회는 과연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2010년 벽두에 터진 아이티 참사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그저 경악했을 뿐이었는데 몇 주 지나다보니 새로운 사실들이 한두 가지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십 수 년 전 고베 대지진도 아이티와 같은 진도 7.0 이상의 지진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일본의 피해는 현재의 아이티와 견주어 볼 때 비교적 가벼웠고 복구도 빨리 이루어졌다. 이유는 단 하나, 일본은 부자 나라로서 재난에 대비해 갖가지 훌륭한 완충장치를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세계 최빈국인 아이티는 지진에 대비한 완충장치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는 나라였다.     
   
아이티는 파파 닥(Papa Doc)과 베비 닥(Baby Doc)으로 잘 알려진 뒤발리에 부자父子가 통치했던 나라로도 유명하다. 그 두 사람은 1957년부터 1986년까지 무려 30년 가까이 대를 이어 잔혹한 독재정권을 유지했고, 수많은 정치범들과 군인들을 제거하는 등 철권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 부의 대부분은 소수의 지배세력에게 흘러들어갔으며 지진이 일어난 지금도 그들은 편하게 자기 집에 앉아 프랑스 요리를 즐긴다고 한다. 물론 아이티가 이 꼴이 난 뒤에는 아이티의 정정불안을 이용해 자원을 알뜰하게 챙겨간 부자 나라들이 있었다.  
   
아이티는 인간에게 인간이 불러온 재앙이다. 진즉에 부자 나라들이 아이티에 관심을 쏟았더라면, 진즉에 부자나라들이 아이티의 자연자원을 축내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아이티의 자립을 도와 스스로 내진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경제력을 제공해주었다면, 그리고 진즉에 자기네 욕심에 따라 아이티를 이용하려는 이기심을 버렸다면 아이티는 지금처럼 참혹한 불행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강도의 지진을 훌륭하게 극복한 일본을 보라! 아이티의 불행을 인재라 부를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

  
가령 지금부터 10만 년 전에 아이티 지역에 큰 지진이 났었다면 우리는 그 자연재해를 입에 담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고고학 발굴을 하다가 우연히 10만 년 전의 지진 흔적을 발견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구에 인간 문명이 자리 잡으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요즘처럼 언론이 실시간으로 현장소식을 보도하는 시대에 접어든 후엔 아이티 같이 불행한 사태는 더더욱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엔 인간이 서 있다고 보아 마땅하다. 인류에게 큰 재앙이 덮쳤을 때, 우리는 분노하고, 어이없어 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생무상을 절감한다. 인간은 그렇게 하느님의 일보다는 인간 자신에게만 관심이 넘친다. 인간 중심으로 모든 외부조건을 판단해서이다.
   
한쪽에서 보면, 지구 역사에서 지진이란 늘 있었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마침 2010년 벽두에 아이티를 덮쳤을 뿐이다. 그리고 10만년쯤 후에 다시 아이티 지역을 덮치겠지. 아니, 앞으로 불과 100년만 흘러도 인류는 올해의 불행을 잊을 것이다. 역사에서 그런 일을 언제나 반복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보면, 아이티의 불행은 인간에게 주어진 도전이며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 던져진 경고이다. 아이티의 처참한 상황에 직면해 우리는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비극을 여과 없이 목격하고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장례가 걱정돼 뒤를 따르지 못하는 이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의 일은 죽은 자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느님의 영역으로 이미 넘어간 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남은 이들은 그저 오늘에 충실하면 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느님과 인간의 영역을 구별해 주었다. 하느님도 아마 우리에게 거기까지 원하실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절대 무력하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들 돌발적인 자연재해를 막을 순 없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를 두고 하느님의 신비라 하는데, 좀 더 쉬운 말로 ‘도무지 하느님의 뜻을 모르겠다.’ 라고 하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느님이 신비는 모르더라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세월이 흘렀지만 1948년에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은 여전히 중요한 좌표로 작용한다.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에 의해 자신과 가족의 건강 및 복지에 충분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심신장애, 배우자의 사망, 노령 기타 불가항력에 의한 생활불능의 경우에는 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세계 인권 선언, 25조 1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