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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누구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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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책임인가?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마태 5,27-30: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흉흉한 세상

   
세상이 흉흉하다. 이제까지 인류역사에서 흉흉하지 않았던 시절이 아닌 때가 딱히 없었을 테지만 요즘은 유난히 흉흉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사흘 건너 흉측한 성범죄가 발생하는 까닭이다. 연쇄 성 추행범, 미성년자 성 추행범, 그리고 여성을 살인한 현장에선 으레 강제적인 성폭력이 동반되고. 이러다보니 사회 전체가 성범죄에 대해 잔뜩 긴장한 느낌이다. 심지어 경찰이 성범죄와의 전쟁이 선포하지 않았는가.
   
얼마 전에 ‘시詩’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해졌고 추억의 배우 윤정희가 노익장을 과시해 더더욱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제목이 ‘시’라고 해서 이 영화가 시인이 되려 했던 소녀 시절의 꿈을 이룬다거나 인생 말년에 사물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그린다는 식의 낭만적인 정서가 들어있다고 추측해선 안 된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도덕 불감증을 고발한 작품이라고 해야 옳다. 사실 그런 게 이창동 감독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윤정희의 중학생 손자가 등장한다. 그 녀석은 할머니를 보호자가 아니라 밥데기쯤으로 여기고 있다. 손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온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친구들과 만나면 으레 게임방에 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큰 사고를 치고 만다. 같은 중학교 여자아이를 친구들과 어울려 수차례 강제로 성폭행을 했고 소녀는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하고 만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부각된 가장 큰 문제는 손자와 친구들이 자신들의 책임인 사건에 별반 죄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어쩌다가 일이 그 지경에 이르렀을까?
     
    
차라리 눈을 빼 던져라
    
예수님은 하느님이 권위를 가지신 분이다. 그래서 율법마저 자유자재로 다루었는데 율사들의 전통적인 율법 해석 방법에 비춰보면 언어도단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십계명에 나오는 ‘간음하지 말라’는 조항을 예로 들어보자. 사실 십계명이 어떤 법인가? 하느님이 모세를 산으로 불러올려 손수 돌 판에 새겨준  천금 같은 법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면서 감히 하느님의 계명에 손을 댔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말이다.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조항을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라는 새로운 규정으로 대체한다. 여기서 ‘갈구하는 눈길로 바라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튜메오’ 동사는 언뜻 대단히 나쁜 뜻 같지만 실은 그저 ‘저 여자 눈길 좀 끌게 생겼네!’ 정도의 가벼운 시선이다. 육체적인 간음에 비길 바 못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눈길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씀한다. 사실 보다 심각한 사태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발언이 아니라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게 하느님이 계명을 수정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원래 의도에 하자가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하자를 가진 하느님……., 하느님의 완전함에 전제할 때 ‘전능자의 실수’라는 불가능한 상태가 성립되는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으로는 부족하며 예쁜 여자에겐 아예 눈길도 주지 말라. 모르기는 몰라도 예수님의 말씀으로 주변 분위기가 제법 싸늘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멈추지 않고 더욱 심한 말씀을 한다. 눈길 한번과 간음이 동일한 죄라는 말씀에 혹시라도 오해가 생길 새라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로써 예수님의 입장은 더없이 분명해졌다.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부주의한 눈길도 엄연히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없다.
    
약 십 년 전쯤 어느 개신교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아는 신부님을 모셔다 특강을 부탁했다. 가톨릭 신부라고 하면 으레 색안경을 끼고 보는 학교 분위기에 로만칼라까지 하고 와 달라는 부탁을 따로 드렸으니 참으로 무모했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부님은 이른바 영언靈言(개신교의 방언) 전문가로서 ‘고린토 전서 이해’라는 강의에 모신 것이었다. 강의 마지막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고약한 질문이 한 가지 나왔다. 어떻게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 수 있습니까? 독신 자체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따르면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사실 손님 강사 분을 모셔놓고 드리기에는 거북한 질문이었으나 어쨌든 질문이 나왔으니 신부님은 대답을 해야 했다.
    
신부님은 가톨릭 사제가 홀로인 것은 ‘소명을 받았을 적의 처지 그대로 살라’는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1고린 7,17) 세속인에 비해 성적 자극에 훨씬 덜 노출되어 있기에 독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대답을 했다. 즉, 모르니까 모르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모든 성범죄가 부주의한 눈길에서 시작됨을 간파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걸 그룹이 대세?
    
최근 들어 우리나라 연예계에 걸 그룹이 대세라고 한다. 키가 늘씬하고 얼굴도 빼어나게 예쁜 어린 여성들이 몇 명씩 몰려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물론 그렇게 젊고 활기찬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매번 유명 기획사에서 장차 연예계에 진출할 신인을 모집할 때면 수 천 명의 청소년들이 몰려들어 경쟁을 한다. 그렇게 어려운 경쟁을 거쳐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들어가면 전문 트레이너가 달라붙어 몸 관리, 얼굴 관리, 노래 관리, 춤 관리, 사생활 관리를 해주고 때가 되면 여럿을 묶어 하나의 걸 그룹이 탄생된다. 아마 TV에 요즘 유행하는 폭로전 프로그램을 몇 차례 본 바 있는 독자라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올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할 청소년 시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인생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그런데 한창 양질의 교육을 정성스럽게 받아야 할 시기에 화려한 몸단장이나 시키고, 상스런 춤이나 가르치고, 연예계에서 교활하게 살아남는 법이나 교육시키더니 결국 어떤 걸 그룹은 학교에 자퇴 원서를 내고 미국 연예계로 진출하고 말았다.
    
기왕 내친 김에 하고 싶은 말 좀 더 해 보겠다. 얼마 전엔 이제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현상을 발견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TV 연예 프로그램을 보면 남자 진행자가 등장한다. 한 결 같이 명문대를 나온 30대 중.후반의 인상 좋은 미남들이다. 그런데 그 중후한 미남이 열일곱 살도 채 되 보이지 않는 소녀 가수만 나오면 반드시 꺼내드는 질문이 있다. “자신의 몸 중에서 어디가 가장 섹시하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 사람이 정상인가? 가까이는 막내 동생 벌이고, 멀리 보면 자칫 딸 벌인 어린 소녀에게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말이다. 어느 날인가 문제의 미남 진행자를 보면서 마이크 감전 사고로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시각과 청각을 극도로 자극시키는 발상들, 그렇게 시청자를 부추겨 돈을 버는 사람들, 그리곤 이런 식으로 어린 날을 보내도록 강요하는 이른바 기획사와 방송계의 어른들. 그들은 입을 모아 ‘청소년들 스스로 성공에 목이 말라 연습생이 되려고 떼 지어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을 어쩌겠는가?’ 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런 게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선도한다는 어른들이 할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뻔뻔함이라니.
   
‘시’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발견된다. 소년들이 저지른 범죄를 무마하려고 부모들과 학교 선생과 신문기자와 심지어 죽은 여학생의 어머니까지 사건을 적당히 덮으려 한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일치된 논리는 죽은 아이는 죽인 아이고, 장래가 구만리 같은 가해자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예수님은 일찍이 인간 본성에 숨은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며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빛날 것이고 눈이 흐려지면 온 몸이 어두워진다는 가르침을 주신 바 있다(루가 11,34-36). 예수님이 누구보다 깊이 있는 인간이해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만사 제쳐놓고 눈부터 다스려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돈을 벌기위해 각종 매체를 통해 눈을 최대한 자극시켰고 결국 온 사회가 어두워지고 말았다. 요즘은 하루걸러 연쇄 미성년자 성 추행범에 대한 보도가 언론을 장식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아직 판단력이 서지 않은 어린 청소년들이 무분별하게 이용된다. 적절한 교육을 받고 인성을 개발해야 할 소중한 시기의 어린 청소년을 데려다가 그들의 몸을 상품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일선에 서 있는 어른들이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네가 비록 육체적인 간음을 하지 않아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속마음까지 아시는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다. 차라리 눈을 뽑아라. 이 몹쓸 위선자들아!’ 마지막으로 ‘세계 인권선언’ 제 26조를 읽어보겠다.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적어도 초등과 기초적 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며 고등교육은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충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존중을 강화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나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상호간의 이해, 관용 및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것이어야 하고, 평화의 유지를 위하여 국제연합의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주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 있어 우선적 권리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