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예수님과 잠

[신앙] 예수님과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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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잠
박태식신부(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불면증아 물러가라

  
30대까지만 해도 잠을 무척 잘 자는 편이었다. 그런데 40대에 들어서자 잠들기가 어려워졌다. 이 생각 저 생각 꼬리에 꼬리는 무는 상념 때문에 자리에 누워 두세 시간씩 뒤척이기 일쑤이다. “내일은 아침 9시부터 강의가 있지. 강의실로 출발 준비를 하려면 아침 7시까지는 일어나야 하고, 그러려면 늦어도 11까지는 잠이 들어야 하는데… 11은 예수님의 12제자에서 유다가 빠진 숫자이고, 그 열둘을 채우기 위해 보궐 선거를 했고 그 때 마티아스가 제비뽑기로 선출되었지. 요즘 개신교 보수교단에서는 총회장 선거를 제비뽑기로 한다지. 그렇다면 지난 동안 총회장 선거에 그만큼 부정이 많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총회장이 되면 어마어마한 떡고물이라도 떨어지나…? 아니 왜 저 시침은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지?”
 
항상 그런 식이다. 어릴 적에 화장실에라도 갈 요량으로 한밤중에 일어나면 아버님이 책을 보고 계시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이해하는 나이가 된 모양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상념을 없애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방법을 개발했다. 먼저 잠자리 옆에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책을 갖다 놓는다. 이를테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라틴어 원본을 잠자리에서 읽는다. 성인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노릇이지만 두 쪽쯤 읽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눈이 절로 감겨온다. 그 때 바로 잠을 자야 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계를 본다, 불을 끈다 하다가 자칫 졸음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절묘한 타이밍이 문제인 것이다. 졸음이 일단 사라지면 침대에 똑바로 누워 300에서 3씩 숫자를 거꾸로 빼나간다. 한 참 숫자를 빼던 중에 내가 176이라는 숫자를 세고 있으면 곧이어 잠이 들고 만다. 하지만 12까지 거침없이 내려가면 숫자빼기 작전은 실패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이 글의 제목인 ‘예수님과 잠’이다.
  
상상을 한다. 어디선가 예수님이 가만히 다가와 나를 위로한다. “불면증아 저만큼 물러가거라. 이는 내가 유독 아끼는 사람이다. 네가 어디라고 감히 여기서 얼쩡거리느냐?” 예수님의 따뜻한 기운 안으로 푹 잠겨든다. 그러면 나는 마치 엄마 가슴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그분 품에 안겨 스르르 눈을 감는다.
   

죽음보다 깊은 잠

  
복음서를 읽으면 ‘잠’이란 그리 권장할만한 일이 못 된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어느 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부디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아이가 구원받아 살도록 해 주십시오.”(마르 5,23) 그러나 예수가 도착해보니 그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그 어린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습니다.”(5,39)라는 말을 던진다. “탈리다 쿰.” 그 한마디에 소녀는 깨어났고 예수님은 그 소녀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말씀한다(5,43). 기적이 일어났다며 넋을 잃어 들고 날뛰는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투병 생활을 끝내고 방금 자리 털고 일어난 소녀를 걱정한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과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예수님이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할 때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 당신들은 여기에 머물러 깨어 있으시오.”(마르 14,34). 그러나 제자들은 속절없이 잠이 들고 만다. “시몬, 당신은 자고 있소?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소? 당신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 영은 간절히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14,38) 예수님은 기도를 하면서 무려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왔었고 그 때마다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삼 년 동안 제자랍시고 따라다녔던 자들이 고작 그 모양이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영(프뉴마)은 간절히 원하지만 육신(삵스)은 약합니다.”라고 번역한 부분을 좀 더 우리말에 가깝게 알아들으면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려’ 쯤 될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몸과 마음이 하나여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예수님 역시 그런 경지를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잘게 나누어 이해했던 헬라 사고(분별지分別智)와는 달리 인간 전체를 하나로 바라보던 히브리식 사고(통합지統合智)를 갖고 있었다.
 
방금 살펴보았듯이 복음서에서의 잠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다. 예수님은 잠을 경계했는데 슬며시 감겨지는 눈꺼풀 사이로 사탄이 끼어 들 여지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 잠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하나됨을 방해 놓을 뿐 아니라 생명까지 앗아간다. 그래서 어떤 이의 죽음을 두고 히브리인은 ‘잠이 들었다’고 했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드신 예수님에게도 ‘사흘 동안 잠 드셨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 삼일 동안 예수님은 죽음의 땅(셔올)에 머물러 있었다.  
  

잠깨우기의 명수 예수님

  
이제 이야기를 조금 편안한 쪽으로 옮겨본다. 야이로와 제자들 말고도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들끓었다. 하지만 애당초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온 이는 별로 없었다. 대체로 몹쓸 병이 들어서, 귀신 들려서, 배가 고파서 온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낫게 해주었고(마르 3,7-12) 배불리 먹이었다(마르 6,30-44). 다들 잔뜩 먹고도 12광주리나 음식이 남았다니 그 날 예수님이 한 턱 단단히 쓴 것이다. 병 걱정 사라지고 배까지 부르자 예수님은 그제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가르쳐준다. 그러나 식곤증이 닥쳐와 아마 조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야기에 재미를 더하는 방법밖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재미 장치들을 끄집어내 보자.
 
어느 지방의 부자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런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으로 물려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청했다. 이스라엘의 상속법에 따르면 둘째 아들은 맏이 몫의 반을 상속받으니 아버지의 재산 1/3을 달라고 한 셈이었다. 아직 아버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루가 15,11-32)이다. 그런데 이야기 중에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돼지 치는 집에 임시 일자리를 얻어 갖은 고초를 겪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그 부분이 재미를 더해준다. 아버지의 낯을 뵐 염치가 없어 망설이는 아들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더없이 좋은 이야기 구성이기 때문이다.
 
어느 유대인 남자가 예리고로 가는 길 가운데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옷을 뺏고 그를 반쯤 죽여 놓았다. 제관과 레위는 그 장소를 피해갔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不淨한 장소(강도 사건이 난 장소)를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반쯤 죽은 사람을 구해 여관에 데려갔다(루가 10,29-37). 이 이야기가 보다 감동적인 이유는 여관 주인에게 사마리아 사람이 던진 한 마디에 있다. “저 사람을 돌봐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당신에게 갚아 드리겠소.”(35절) 그럴 게 아니라, 아예 신용카드와 비밀번호를 여관 주인에게 통째로 맡겼으면 일이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이 다시 온다는 약속을 통해 혹시 강도당한 사람의 상처가 더 깊어지지나 않을까, 혹시 치료비라도 부족하면 어쩌나 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사이에 식곤증이 물러갔을 것이다.
  
딱히 그 자리에 있어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예수님은 다음날 하실 이야기를 전날 밤 잠들기 전에 열심히 구상하였을 것이다. “내일 또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그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쳐 줄까?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참다운 이웃이 누구인지 가려내는 방법을 참신하게 알려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밀려드는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까?” 예수님은 글자 그대로,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깨어 있음

  
예수님은 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을 잠이라 불렀다. 잠을 자면서 조금씩이나마 죽음을 미리 체험한다는 뜻일까? 아무튼 얼마나 잠을 싫어했는지 제자들이며, 야이로의 딸이며, 주변에 몰려든 군중의 잠을 부지런히 깨웠다. 아니, 잠들었던 무덤에서 3일만에 일어났으니 스스로의 잠도 깨운 분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아마 ‘깨어 있음’만이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일본 진종眞宗불교의 거목인 기요자와 만시(1863-1903)의 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고 든든한 토대를 마련할 것인가? 내 생각으로는 무한자無限者, 또는 절대자絶對者를 만나야만 거기에 이를 수 있다. 무한자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그런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무한자는 그를 찾는 자가 발견하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무한자가 밖에 있다, 혹은 안에 있다 하고 정의 내릴 수 없다. 무한자를 만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든든한 토대 위에 설 수 없다. 그 만남을 통하여 완벽하고 든든한 토대를 얻게 되는 내적 발견의 과정,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어 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겨울부채>, 하네다 노부오 엮음, 이현주 옮김, 생활성서, 2003, 26-27)
 
잠들 때마다 나는 예수님을 생각한다. 예수님 공부가 직업이니 한시라도 그분을 놓고 싶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원래는 이기적인 ‘나’를 없애고 텅 빈 ‘나’ 안에 무한자 예수님을 들여놓자는 고급스런 심산이었다. 비록 원래 의도에서 한 참 벗어나 요즘은 예수님을 불면증 치료제로 사용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넓디넓은 마음 밭을 갖고 있는 분이니 만치 그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날마다 느느니 똥배짱뿐이다.
 
매일 밤 나는 잠을 잔다. 잠이 안 와 고생하는 날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도 잠을 거른 적이 없다. 하지만 나의 잠은 전적으로 다음날에 깨어나기 위한 잠이다. 나는 잠을 찬양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잠을 통한 충분한 휴식 뒤에 찾아올 ‘깨어 있는’ 하루의 삶을 찬양한다. 그렇게 잠과 깸을 수 없이 반복하면 언젠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잠이 찾아올 테고 그 다음 날 드디어, ‘나’는 완전히 없고 ‘예수님’만 온전히 있는 ‘깨어 있음’을 얻게 되리라.  
  
그 점에서 예수님과 나는 잘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