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예수님의 평화

[신앙] 예수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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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평화

평화가 아니라 검을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베풀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평화를 베풀러 오지 않고 오히려 칼을 던지러 왔습니다.”(마태 10,34). ‘예수님과 평화’라는 주제로 글 부탁을 받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성서구절이다. 아니, 이는 예수님이 설파하신 평화를 떠올리면 으레 생각나는 구절이라고 말하는 게 솔직하겠다. 그리고 저절로 이어 떠오르는 의혹 한 가지. 그렇다면 예수님은 혹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와 다른 평화를 의도한 게 아닐까? 그분의 말씀을 계속 들어보면 의혹의 색깔은 점점 짙어진다. “사실 나는, 자식 된 사람이 제 아버지를 거스르고 딸이 제 어머니를 거스르고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스르도록 갈라놓으러 왔습니다. 각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 식구들일 것입니다.”(35-36절)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 중 가장 작은 단위는 아마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란 피로 연결된 공동체라 비록 가장 작은 공동체일지는 몰라도 그 어디보다 탄탄한 결속력을 자랑한다. 아무리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아무리 사랑해도 부족한 사람, 어떤 경우라도 절대 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의 사람, 그런 사람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평화가 필수요건이어야 한다. 매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식구들 사이에 어찌 평화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만일 가족에 평화는 없고 갈등과 미움과 반목만 있다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집구석이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다.

진정한 가족

   
나사렛 고향을 떠나 삼년 동안 공생활을 하시던 어느 날 그분의 가족이 찾아왔다(마가 3,20-35).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고향으로 잡아 가려고 온 친척들이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위대한 구원자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최고의 영광을 돌려 마땅한 분이지만 역사의 예수님 주변에 있던 이들에겐 사정이 달랐다.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폄하하려 했던 자들은 그분을 두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 ‘먹보에 술꾼’, ‘백성을 속이는 자’, ‘거짓 메시아’, ‘세례자 요한의 아류’라 불렀고, 그러다가 결국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사들은 말하기를 ‘그는 베엘제불에 사로잡혀 있다’고도 하고, 또는 ‘귀신 두목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 고도 했다.”(마가 3,22)

구약성서에 보면 아하지아 왕이 에크론 시市의 수호신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지 물어본 까닭에 예언자 엘리야의 분노를 샀는데(왕하 1,2 이하). 에크론의 수호신이 바로 ‘베엘제불’이다. ‘집의 주인’, 혹은 ‘신들을 거느리는 이’란 뜻이다. 또한 두 번째 가능성으로 제시한 ‘귀신 두목’은 구체적으로 예수를 40일 동안 유혹했던 ‘사타나스’를 가리킨다. 정리하면, 예수님이 이방신의 괴수인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거나 유대의 귀신 두목인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보든 예수님은 악독한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콜랭 드 플랑시의 지옥 사전에 묘사된 베엘제불, 파리, 1863)

예수님에 대한 주변 평가를 고려할 때 ‘예수님이 (귀신에 사로잡혀) 미쳤다’는 소문이 당시에 널리 퍼졌을 테고 급기야 모친을 포함한 가족이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 출동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설교하시던 집에 군중이 워낙 빈틈없이 들어차 있어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군중 속으로 전갈을 보내 가족이 왔음을 예수님에게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은 뜻밖에도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는 놀라운 반문을 한다. 어머니조차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머니를 거부한 말씀 외에도 예수님은 집안 식구가 원수이고(마태 10,35-36),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겠다는 어떤 제자를 만류하면서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라.”(누가 9,60)는 말씀도 한다. 모두 기존의 가족 관계를 거부하는 말씀들이다.

우리네 정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보통 불효자가 아니다.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온 어머니를 버선발로 나가 맞지는 못할지언정, ‘도대체 누가 내 어머니냐’고 반문을 하다니……. 이해하기 힘든 태도이다. 하지만 가족의 인연을 그처럼 가볍게 여긴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고 반문한 뒤에, 예수님은 주변에 둘러앉은 군중을 둘러보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 3,34-35)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평화


우리가 흔히 다음과 같은 평화를 상상한다. 우선 사람이든 국가든 자연이든, 서로 간에 다툼이 사라져야 하고 나아가 서로를 자신처럼 아껴 사랑이 피어나는 냄새가 솔솔 나야한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사가 형통하여 결국 심리적인 평온 상태에까지 이르러야 진정한 평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단언하건대 그런 평화는 우리에게 없었다. 지난 수 천 년 역사에서 단 하루도 전쟁이 없던 날이 없었고 와중에 죄 없는 아기들이 수도 없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UN이 세계평화를 이루겠다고 하지만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우리에게 가까이 상황을 끌어와 보면 평화는 더욱 요원해진다. 시청 앞 서울광장에 조용한 날이 없고 검찰청에 들어가는 인물이 날로 다양해져 이제는 전 대통령과 검찰이 명예를 걸고 정면승부를 벌인다. 아니, 좀 더 가까이 오면 아들 다섯이 서울대에 입학해도 막내아들 하나는 삼수를 해서 부모 속을 뒤집어 놓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 점에서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예수님의 가족 개념은 우리의 기대치와 다르다. 오히려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큰 가치를 지향한다고 봄이 옳겠다. 비록 피와 살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로 진정한 가족이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가족과 혈연이라는 세상 가치가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평화도 그렇게 다가온다. ‘이정도면 되겠지!’ 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를 거부한다. 평화는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있는 과정 개념이며 우리가 실행해야 할 도전 개념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이 허락하시기 전까지 진정한 평화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두고두고 되씹어 마땅한 선불교의 화두話頭처럼 다가온다.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에 대해 속 시원한 설명을 기대했던 독자들은 이 글을 읽고 아마 실망하셨을지 모른다. 필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제멋대로 세워놓은 평화 기준을 빌미로 자기만족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