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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웃음의 전달자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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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전달자 예수님

박태식신부(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유머 한 가지

얼마 전에 들은 유머 하나를 소개한다. 성부⋅성자⋅성령께서 모였는데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선 미국을 가보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성부께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미국에서는 도통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다음 여행지로 예루살렘이 거론되었다. 이번에는 성자께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처참한 꼴로 죽어야 했던 그 곳에 절대로 다시 가지 않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지막으로 바티칸을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성령께서 기뻐 펄쩍 뛰면서 어서 가지고 나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배낭도 싸고 비행기 표도 사더란다. 왜 그렇게 좋아하는 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성령께서 대답하시길 “난생 처음 가보거든!”
  
이 유머 한 자락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을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이런 불경스런 유머를 가톨릭 계통의 잡지에 실을 수 있느냐? 며 분통을 터뜨릴 분이 있을 것이다. 바티칸과 교황님의 권위에 손상이 입힌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진정한 신앙이 실종된 요즘 세태를 떠올리면서 쓴 웃음을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반응은 이 유머를 유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그저 한번 듣고 웃으면 되지 그리 심각해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파격적인 언어
  
예수님은 파격적인 표현을 즐겨하셨다. 이를테면 ‘눈을 빼어 던져라.’(마태 5,29), ‘손을 잘라 던져라.’(5,30), ‘오른뺨을 맞으면 다른 편 뺨을 돌려대라.’(5,40), ‘연자 맷돌을 목에 감고 빠져 죽어라.’(루가 17,2) 등등이 있는데, 이를 글자그대로 알아듣고 실행하는 이는 아마 예나 이제나 없을 것이다. 무슨 죽을 짓을 했다고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자살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 치고 몇 명이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파격적인 예수님의 말씀에서 정작 중요한 점은 말씀이 주어진 상황이다. 예수님은 ‘눈을 빼어 던져라’와 ‘손을 잘라 던져라’의 바로 전에 갈구하는 눈으로 여자를 쳐다본 경우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마태 5,28). 여기에 씌어진 헬라어 동사가 ‘에피튜메오’인데 그 뜻은 그저 관심을 갖고 쳐다보는 정도를 뜻한다. 말하자면 지나가는 여자를 은근하게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육체적인 간음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이다. 과연 한 번의 눈길로 불륜이 성립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던 사람 중 단 한명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요즘사람들도 속수무책이기는 마찬가지다.
 
가르침을 듣는 군중들의 난처한 눈빛을 예수님이 모르실 리 없었다. 그래서 뜻을 보다 분명하게 알아듣도록 파격적인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눈을 빼어 던져라….’
 
친척중의 어느 어르신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분의 딸이 중학생 시절에 조용필을 좋아했단다. 그래서 조용필의 콘서트만 열리면 만사 제쳐놓고 표를 구해 가곤 했다. 콘서트에 가면서 어른인척 보이기 위해 가끔씩 변장을 한 모양인데 어르신은 한때의 열정이려니 하고 못 본 척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딸이 아빠에게 오더니 심각한 어조로,
 
“아빠, 오래 동안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조용필 오빠와 결혼을 해야겠어요.” 하더란다.

황당한 일 아닌가? 중학생 딸아이가 학업도 포기하고 대마초 전력이 있는 조그맣고 새카만 피부의 중년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니. 어르신은 그 때 기지를 발휘했다.
 
“결혼을 허락한다. 어서 데려와라.”

아버지의 반대를 예상했던 딸은 난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용필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은 결국 꿈을 접었고 나이가 차 조용필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지금 잘 살고 있다. 아빠의 파격적인 대답이 소녀시절의 열정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파격적인 언어는 종종 어려워만 보이던 문제를 쉽게 해결한다. 그래서 미처 깨닫지 못하던 차원을 알아보게 만들고 인생을 새롭게 재단할 수 있는 지혜를 선사한다.
  

적절한 말씀

  
제자들과 함께 있던 예수님에게 부자 청년이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구한 적이 있었다(마르 10,17-27). 예수님이 그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청년은 당돌하게도 그 명령을 완벽하게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가진 문제를 즉시 알아보았다. 교만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십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예수님은 청년의 자만심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아보고 구체적인 요구를 한 가지 더 한다.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는 것이었다. 상당한 재력가로서 재물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청년은 슬픈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쓸쓸히 돌아서는 청년의 뒤 꼭지에 대고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25절)였다.
  
예수님의 유머감각이라는 측면에서 위의 에피소드는 살펴볼 만하다. 우선 주목할 점은 이 말씀이 예수님의 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유대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격언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격언 류는 비단 여기뿐 아니라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는 황금률이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바쳐 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르 12,30-31)는 ‘사랑의 이중계명’에서도 발견된다. 예수님은 상식이 통하는 범위 내에서,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말씀(격언, 속담, 유행어)을 사용했던 것이다. 자세하게 분석해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 대략 90% 정도를 ‘장로들의 전승’이나 그 후속편인 <미슈나>, <토세프타>, <탈무드>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갖는 독특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독특성은 바로 적절한 말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 솜씨가 일품이라는 데 있다. 그 같은 예를 마르 2,15-17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예수님과 죄인들이 같이 식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었다. 에제 4,13;호세 9,3-4에 따르면 죄인들이 차린 밥상에 의인이 앉는 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칫 지루한 율법논쟁으로 번져갈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의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한 법이다.’(17절)라는 한마디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 역시 당시에 널리 나돌던 유행어였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부자청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변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청년은 보나마나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왔을 것이다. (아니면 어떻게 부자인지 알아보았겠는가?) 그러더니 예수님 앞에서 감히 십계명을 빠짐없이 다 지킨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삼년 동안 그저 거지신세나 겨우 면한 채 유랑생활을 하던 제자들에게는 몹시 속이 거북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한 마디로 청년이 힘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아마 삼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갔을 법하다. 우리의 베드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즉시 나서서 한 마디 한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28절) 조금 얌체 같아 보이지만 평소부터 두서없이 나섰던 베드로를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버나드 쇼(1856-1950)가 미국의 발레리나 이사도라 던컨(1880-1927)의 자유연애 상대자로 뽑힌 적이 있었다. 그 때 던컨 쪽에서 쇼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저의 육체를 가지고 당신의 두뇌를 가진 갓난아기는 얼마나 훌륭할까요?” 하고 던컨이 유혹하자 쇼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소생의 육체를 가지고 당신의 두뇌를 가진 애란 얼마나 불행한 가 생각해주시오.”  

버나드 쇼가 예수님의 유머감각을 따를 리 없지만 그저 한가지의 비교거리가 될 성 싶어 예로 들었다.  
 

예수님의 유머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과장된 숫자이기는 하지만 여성과 어린이를 제외한 장정의 숫자만 5천이었다고 하니 그 인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인기의 첫째 비결은 예수님이 갖고 있던 병 고침 기적과 배불리 먹이는 음식기적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에 더해 놀라운 이야기 솜씨도 꼽을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탁월한 상황분석과 그에 딱 들어맞는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삼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모이게 만들 수 있었겠는가?
 
보통의 학문적인 글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머감각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지 않는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이 있게 접근하기 위해서 그분의 말씀을 당시의 종교적∙정치적∙문화적인 배경으로 치밀하게 분석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이다. 물론 그런 접근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며, 또한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씌어진 상황과 가르침을 한 걸음 물러나 훑다 보니 예수님의 유머감각이라는 주제로 한 편의 글을 쓸 만한 틈이 보였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감동을 웃음에 실어 전달한 분이었음에 틀림없다. 다만 예수님의 유머감각이라는 주제로 또 한 번의 분석적인 글을 쓴 필자의 한심한 능력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