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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보면 보이는 참된 사랑의 길(연중 2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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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보면 보이는 참된 사랑의 길

종교와 우상은 사촌지간이라고 한 법정 스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님을 뜻을 사는 것과, 사탄이 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멀쩡하던 분이 별안간 죽겠다고 하시니, 그것도 다른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고 하시니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사실 이런 말을 듣고 막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존경하는 스승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겠다는데, 그렇게 하시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그 길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네가 이 길을 막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요,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예수님은 이처럼 단호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은 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생명과 축복을 위해 이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하지 않고 결코 믿음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 그러나 그 고백만으로 너의 믿음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지금 내가 져야할 이 십자가를 너도 질 수 있어야 한다. 네가 만약에 이 십자가를 거부한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어떤 삶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이 십자가에는 어떤 가르침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참된 사랑의 길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분명히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사형 틀,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를 이제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3천명도 넘든 사람이 십자가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예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까? 다른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진리,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감히 죽음의 힘도 누르지 못할 강한 힘이 사랑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하면 고난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고난이 아니라 사랑의 짐을 지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사랑이 빠져버린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보면 참된 사랑의 길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사랑이란 어떤 사랑입니까?

우선 십자가란 내가 죽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십자가란 나를 위해서 남을 죽이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죽은 형틀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라2:19-20)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왜 그리스도의 축복과 치유의 기쁨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나를 죽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의 길을 가려면 나라고 하는 자아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도 다 잃고, 자식도 잃고, 아내도 그리고 자신의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그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고백합니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치유되지 못했습니다. 언제 욥의 삶이 치유됩니까?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라고 고백할 때였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하느님이 개입하시고 욥의 삶을 치유하십니다.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자기를 버리고”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는 십자가, 그것은 거짓 십자가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허물어질까요? 자기를 버리는데서 허물어집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믿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공직자들이 백성을 위해 손해 보는 공직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재벌들이 프랑스의 재벌들처럼 손해 보는 재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아픔을 덜어달라고 세 번이나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봉사했습니다.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쳐서 헌신했지만 정작 자신이 한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에도 바울은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자신을 버리니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이 보여주신 길을 가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보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기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버리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은 승리였습니다. 부활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희망을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 승리를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십자가란 고백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십자가는 마음으로, 혹은 고백이나 지식으로는 질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이것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한다.”

베드로가 예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 했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모르는 신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는 내 자신이 예수님의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반대하는 사탄이 될 수 있음을 알아 야합니다. 어떤 때입니까?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 왜 침묵하라고 당부하셨을까요? 진리란 그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친히 그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는 삶을 통해서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의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과자 사러 갔다. 동생이 자동차를 산다고 했다. 돈이 모자랐다. 내가 삼백 원만 사 먹었다. 자동차를 살 수 있었다. 기분이 참 좋았다. 내가 누나니까 그래야 된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 바로 이게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과자를 먹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 먹고 싶었던 욕망을 동생을 위해 기꺼이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 포기를 행복하게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자동차를 갖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더 가슴에 들어오는 말, 

“내가 누나니까?”

“내가 누나니까? 더 크니까? 내가 더 가져야 돼” 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가 크니까, 내가 포기해야 돼 라고 생각하는 것, 얼마나 예쁜 마음입니까? 

여기서는 사랑이 뭔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꺼이 너를 위해, 주님을 위해 자기를 줄 수 있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삶은 감상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삶이 거룩하고 옳다고 인정했다 할지라도 지금 결단하고 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는 주님의 방해꾼입니다. 사탄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사탄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19)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이 열쇠로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를, 상처가 있는 곳에 치유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다툼이 있는 곳에 화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을 열어가는 성도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우리 강동교회를 이런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