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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인사이드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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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인사이드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씨 인사이드

안락사! 분명 거북한 주제이다. 하지만 죽음을 점점 더 가까이 느끼는 나이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한번쯤 그 생각을 해보기 마련이다. 필자 주변 사람들도 원칙적으로 안락사를 반대하지만 자신이 불치병에 걸리고 극심한 고통에 놓일 경우 의사나 가족에게 안락사 부탁을 할지 모른다는 이가 대부분이다. 사실 그 말은 일이 닥치면 반드시 안락사를 부탁하리라는 뜻으로 들렸다. 필자가 몸담은 그리스도 교회에선 자살이나 안락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런 한 가지 원칙만 갖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디 아더스2001’를 만든 바 있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이 ‘인간의 권리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주제로 영화를 만들었다. ‘씨 인사이드’(Sea Inside, Mar adentro, 극영화,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 2004년, 125분). 이 영화의 주인공인 라몬(하비에르 바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은 26년 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목 위를 제외한 전신에 마비가 온 남자이다. 아버지, 형, 형수, 조카 등 가족의 따뜻한 배려로 오랜 시간 살아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안락사 당하기로 작정한다. 그를 도와주는 변호사와 법정투쟁까지 벌였으나 자기 생각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재판에 지고 만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을 수조차 없는 라몬이 택한 길은 자신을 사랑하는 로사(롤라 두에나스: ‘귀향2006’)의 힘을 빌려 독약을 마시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난 일차적인 느낌은 라몬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이었다. 저런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죽음을 결심할 수도 있겠구나! 라몬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 라는 로사의 물음에 ‘마치 태어나기 전에 아무 것도 없었듯이 죽고 난 후에도 아무 일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죽음과 함께 인간의 존재는 후- 불면 날리는 한줌의 먼지처럼 완전히 소멸하리라는 뜻일 게다. 자유를 향한 라몬의 신념은 그를 설득하러 찾아온 예수회 신부(그 역시 전신마비이다)와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신부를 향한 그의 마지막 말은 ‘나를 내버려 두시오!’이다.
감독은 영화를 잘 만들었다. 자칫 지루해지고 계몽적인 내용이 될 법한 주제를 적절한 긴장과 유머를 통해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가볍게 진행시켜나갔다. 감독은 가능한 한 라몬의 정신세계에 깊이 파고들려는 노력을 했으며 관객은 지도를 보듯 그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죽음으로 떠나는 여행길에 배웅 나온 가족과 라몬이 헤어지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손수건을 꼭 준비하시기 바란다. 라몬은 온전히 정신의 힘만 빌려 자신의 침대에서 바닷가까지 날아간다. 그러나 항상 바다가 코앞에 바라보이는 데서 추락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드디어 시원한 마찰음을 내며 바다 속으로 빠져든다. 죽음과 함께 26년간이나 족쇄에 묶여있었던 그의 몸과 마음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이다.

안락사논쟁

몇 년 전 미국에서 ‘밀리언달러 베이비’(극영화, 미국, 2004년, 133분)라는 영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가 안락사에 대해 더없이 분명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매기는 혀를 물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이후로는 침대에 꽁꽁 묶여 영구적으로 인공호흡기 튜브를 목에 꽂고 살아야 하는 처량한 처지가 되고 만다. 매기는 단하나의 친구이자 스승인 프랭키에게 부탁을 했고 그는 호흡기와 생명연장 기계를 모두 꺼버린 채 치사량의 아드레날린을 주사한다. 영화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안락사와 더불어 프랭키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교회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설정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나누어받았기에 함부로 다루어서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창세기 1장 26-27절) 그 구절에서도 ‘우리 모습을 닮은 대로’에 핵심이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Imago dei)이기에 스스로 목숨에 손을 대면 절대자를 영역을 넘보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칙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고통을 없애기 위한 임의적 조치는 자살방조죄나 촉탁살인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소생가능성이 없는 식물상태의 환자에게 의학적인 조치를 취했을 경우 암묵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실정이다. 그런 사정은 대개의 선진국도 비슷하다. 미국은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환자의 음식공급 튜브를 제거할 수 있게 허용했는데 그 결정은 당사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부여된다고 한다. 다만 오리곤 주법에선 말기환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원할 때 의사가 치사량의 약을 투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안락사를 넘어 자살까지 법으로 허용하는 셈이다. 한 걸음 더 나가 네덜란드에서는 불치병, 견딜 수 없는 고통, 환자의 이성적 판단 등의 조건만 맞으면 안락사를 허용한다. 가장 급진적인 입장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상영되자 장애인 권익보호운동에 앞장선 사람들과 보수인사들 그리고 낙태반대론자들도 반대에 나섰다.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장애보다 죽음이 낫다고 가르친다.”, “할리우드가 미국 대중의 도덕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좌익의 세속적 가치관을 담고 있는 영화다.” 등등. 하지만 이 영화로 75세의 노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고 힐러리 스웽크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1999’에 이어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작품상과 남우조연상(모간 프리먼)도 수상했다. 영화의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안락사를 두둔하는 풍조의 적극적 표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안락사를 인정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더 카플란, 똑똑한 쥐 멍청한 인간, 김원중 옮김, 늘봄 2007, 117-131 참조)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이 절대 희박한 식물 상태의 환자가 있다. 그리고 자연사하려면 최소한 50-60년이 걸린다는 판단이 난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런데 중간에 뜻하지 않은 정전으로 인공호흡기가 잠시 멈추고, 그 짧은 순간에 간호원이 실수로 열어놓은 문틈으로 들어온 파리가 환자의 콧구멍으로 들어가고, 재채기로 파리를 밀어낼 수 없는 환자의 허파까지 도달해 염증을 일으켜 환자의 목숨이 위태해지고, 그쯤에서 마지막 수단인 심장충격기를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모든 과정이 CSI 뉴욕 수사대의 활약으로 재구성되었다면, 우리가 간호원이나 파리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있느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돌리는 환자 가족도 벌을 받아야 할까? 그의 시신을 실험도구로 사용하거나 장기 기증도 혹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의 영역을 건드리는 것은 아닐까? 과연 그 경우도 안락사로 볼 수 있을까?
물론 엉뚱한 예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가 진행되면 사실 어디서부터 논쟁을 시작해야 할지 애매해진다. 아니 좀 더 그럴듯한 예를 찾아보자. 암으로 크게 고생하시다가 의식불명상태에 들어가 이미 숨까지 몰아쉬기 시작한 상태의 어머니를 앞에 둔 자녀들에겐 선택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들은 보통 심장충격기를 사용하지 않는 게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한다.

잠수종과 나비

‘씨 인사이드’는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며 세상을 하직할 권리를 강조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입장도 물론 존재한다.
몇 년 전에 전신 마비에 한 눈만 성한 남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책을 출판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엔 ‘세상에 별일도 다 있네!’ 하고 슬쩍 넘겨버린 기억이 나는데 그 남자의 실화가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쥴리안 슈나벨 감독, 극영화, 프랑스/미국, 2007년, 112분)라는 멋진 제목의 영화로 내게 다가왔다.
 
실화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 경우 언제나 큰 위험부담을 안는다. 특히, 널리 알려진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삼을 때는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잘못하면 사실을 왜곡했다하여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잘 만들어도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종종 받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저 ‘밑져야 본전’이라는 푸념이 절로 나올 법하다. 하지만 그처럼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감독들이 실화에 도전한다. 바로 픽션에서 느낄 수 없는 남다른 감동이 실화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온몸이 마비된 사나이 장 도미닠(장-도). 그가 세상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깜박거릴 수 있는 왼쪽 눈뿐이다. 장은 세계적인 패션잡지의 편집장으로 프랑스 예술계의 정 중앙에 서 있던 사람이었는데, 잔인한 운명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좌절에 빠져 죽음까지 생각했던 장-도는 주변의 도움과 본인의 빼어난 의지로 새로운 삶에 적응해나갔고 마침내 글을 쓰기로 작정한다. 극도의 열악한 조건에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의 꿈을 실현시켜줄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출판사 사장, 언어치료사, 물리치료사, 의사, 부인과 아이들, 애인, 아버지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그의 눈까풀 언어를 글로 옮겨줄 대필인. 이제 장-도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재산인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해서 집필을 시작한다.

일인칭 시점

영화는 철저하게 일인칭 시점에서 진행된다. 우선 기능이 멈춘 오른쪽 눈을 봉합하고, 물리치료사와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병원생활에 적응하고, 출판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필인을 구하고, 15개월 동안 무려 20만 번의 깜박임으로 130쪽 분량의 책을 완성하는 과정이 카메라에 담겨있다. 말하자면 영화 카메라가 그의 왼쪽 눈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한쪽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단편적이고 지루하다. 그런데 감독은 영화 시작 단 오 분만에 ‘일인칭 시점 영화’라는 어려운 조건을 편한 신발처럼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우선 마치 큰 퍼즐을 맞추듯이 단편조각들을 모아 장-도가 바라보는 세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장-도의 왼쪽 눈에 관객의 감정이 이입 되자 영화가 훨씬 편해졌고 마침내 그와 함께 웃고 울고 답답해하고 꿈꾸고 깨어날 수 있기에 이르렀다.
장-도는 스스로 몸의 자세를 움직일 수 없으니 그와 대화를 나누려면 누구라도 그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어야 한다. 또한 눈 깜박임으로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까닭에 언어치료사가 알파벳 판에서 한 글자씩 가리키고 원하는 글자가 나오면 눈이 깜박이는데(카메라가 열리고 닫힘), 그를 통해 관객도 마치 글자 맞추기를 하듯 메시지를 전달받게 된다. 그런 식의 연출 방법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감독은 대단한 재주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감독인 줄리안 슈나벨은 70년대에 혜성처럼 서구 예술계에 등단한 화가로 세상에 먼저 알려졌다. 그가 추구했던 화풍은 이른바 ‘뉴 페인팅’(New Painting)이라 부르는데, 깨진 접시조각들을 캔버스에 모자이크로 붙인 후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하는 방식이다(조선일보 2008년 3월 25일 참조). 하나같이 입체감이 듬뿍 살아나는 작품들인데, 영화에서도 그의 특기가 발휘돼 주인공의 눈이라는 주관적 세계를 객관적 세상으로 끌어냈다. 장-도의 단편적인 인상들을 모아 영화라는 캔버스에 거대한 그림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장-도가 완성한 책의 제목이 바로 ‘잠수종과 나비’이다. 잠수종에 갇혀있는 답답함과 고치를 벗어나 날아오르는 나비의 자유를 대비시킨 것인데, 영화에 나오는 독백들은 대체로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잠수종과 나비’를 통해 인간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영화 시작에 극지방의 거대한 빙산이 쪼개지면서 바다에 빠져드는 장관이 나온다. 인간 장-도의 침몰이 그만큼 절망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필름을 역으로 돌려 빙산이 원형을 되찾는 모습으로 재구성된다. 이미 장-도는 숨을 거둔 후였지만 그가 남긴 숭고한 교훈이 무너져 내린 사태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 감독이 전해주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감지되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인공인 메튜 아말릭(‘뮌헨2006’)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잠수종에 갇힌 인물인 장-도를 실감나게 표현했기 때문인데 무엇엔가 놀란 듯한 왼쪽 눈에 삐뚤어진 입, 그리고 전신마비의 몸 상태를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래서 처음엔 장-도 역할을 두 명의 배우가 맡아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마치 ‘오아시스2002’에서 문소리가 그랬던 듯이 장-도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공주에게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며 탄복하고 말았다. 한 명의 배우였던 것이다. 비록 세 차례 나왔지만 아버지 역의 막스 폰 시도우(‘정복자 펠레1987’)의 연기도 훌륭했다. 대배우의 면모가 물씬 풍겨났다. 독자 중에 혹시 영화가 지루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재기 넘치는 독백과 대화는 그런 염려를 말끔히 씻어줄 것이다.    
‘잠수종과 나비’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한 인간의 위대함을 그려낸 영화다. ‘씨 인사이드’가 죽어야 할 이유를 알려주는 반면 ‘잠수종과 나비’는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를 밝혀준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필자는 비슷한 시기에 앞의 두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또한 비슷한 시기에 언론에서 두 인물을 보았다. 한 사람은 서울대 이상묵 교수로, 라몬과 똑 같은 처지에 놓인 그는 최첨단 장치가 장착된 휠체어를 타고 각종 시범을 보이며 자신이 여전히 왕성한 학문 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온 국민에게 선전했다. 그분의 모습을 TV를 통해 보면서 한편으로 감동을 맛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살짝 서글퍼졌다. 아마 ‘씨 인사이드’를 보고난 직후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또 한 사람은 샹탈 쉐비르라는 프랑스 여성으로 코 속 비강에 생긴 악성 종양이 커지면서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자살한 여인이다. 그녀는 법원에 안락사를 시켜달라는 요청을 냈지만 기각되었고 결국 지난 3월 19일에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여인은 끔찍한 고통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어 자살을 한 것이었다.
영화라는 매체는 자체적으로 독특한 논리구조를 갖는다. 표현방법에 따라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까지 바꿀 수 있는 마술적인 힘이 있는데, 앞의 두 영화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장-도와 라몬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다. 아니 최소한 목 위로는 멀쩡하니 라몬이 장-도에 비해 조금 나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 그게 비교거리나 되는가? 개인이 느끼는 절망은 절대적인 것이기에 결코 어느 누가 덜 불행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관건은 결국 고통 받는 이의 의지가 어느 쪽으로 작용하는가? 이다. 장-도는 끝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원했고 라몬은 존엄성을 지키면서 끝을 맞이하기 바랐다.
바다는 밖에 있다. 그래서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광활한 바다로 찾아가 좁은 세상살이에서 낀 먼지들을 걷어낼 수 있다. 그러나 목 위에만 감각이 있고 나머지 몸으로는 느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이에게 바다란 무엇일까? 더욱이 바다를 유난히 사랑했던 사람이 그 꼴을 놓였다면 그처럼 잔인한 형벌이 없지 않겠는가? 그에게 바다는 오직 상상 속에서만 허락된 공간일 뿐이다. 라몬은 그런 처지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어떤 이유라 하더라도 자살을 죄악이라 부른다. 그것이 비록 안락사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두 편의 영화에서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  
‘잠수종과 나비’는 2007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2008년 골든 글로브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장 도미닠 비도는 프랑스 유명 여성 패션잡지 ‘엘르(Elle)’지 편집장을 지냈고 갑작스런 발병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가 1997년 사망했다. 그의 유작인 ‘잠수종과 나비’는 프랑스에서 15만부나 팔려나갔고 2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씨 인사이드’ 역시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베니스 영화제에서 큰 상들을 받았다. 아마 안락사를 정당화했다는 이유보다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