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아름다운 노년

아름다운 노년

612
0
공유

아름다운 노년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창세 22,10-12: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다. 그 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은 내가 이제 알았다.”

구약성서의 노인들

딱히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요즘 들어 성인병을 앓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이들 중 암, 고혈압, 당뇨 등은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인데 이렇게 많아진 까닭은 당연히 노인 인구가 대폭 늘어나서이다. 오래 살면 그만큼 병치레가 잦은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따라서 얼마만큼이나 병에서 자유롭게 사는지가 노년을 보람 있게 사는 관건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노인 몇몇이 만나면 건강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 마련이다. 몸에 좋은 음식으로 무엇이 있다더라, 어느 병원의 어느 의사가 용하다더라, 어떤 운동을 하면 좋다더라. 이야기가 끝을 모르고 펼쳐진다. 심지어 건강이 노년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조건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쯤에서 성서에 등장하는 노인들 중에 귀감이 될 만한 분이 있는지 한 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 달에는 구약성서의 노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약성서를 두루 훑어보면 노인들이 의외로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들의 계보는 물론 12부족 동맹과 왕정을 거치면서 원로급 예언자들과 사제들이 줄을 잇는다. 게다가 아브라함 이전의 전사前史시대로 가면 그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특히, 그 시대의 노인들은 곧잘 이삼백 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사실 이를 글자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노릇이다. 어디 인간 수명이 백세라도 넘어서는 게 쉬운가 말이다. 그처럼 구약의 노인들은 대체로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모습들로 그려져 있어 인간 냄새를 맡기는 힘들다. 이렇게 과장된 면면들은 모두 한 가지 점을 지향하는데 바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종교적인 인물을 그려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노인들 중에 필자의 눈에 예외적인 모습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족장 아브라함이다. 수많은 구약의 노인들 중에 유독 이 본문에서만 무엇인가 우리 삶에 직접 닿아있는 듯 익숙한 느낌이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약속의 자식을 하느님께 바쳐야만 했다. 그런 심각한 도전을 받아 아브라함이 과연 어떻게 노년의 위용威容을 갖추었는지 살펴보겠다.

아브라함의 제사

‘아브라함의 제사’라고 이름 붙여진 22장은 독특하다. 창세기 12-50장은 족장들의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서술해나가는 내용으로, 역사책에 가깝다. 그런데 그야말로 뜬금없이 아브라함의 제사가 등장한다. 이를 두고 어떤 연구자들은 입에서 입으로 떠내러 오던 이야기가 우연한 계기로 아브라함 전승 안에 비집고 들어온 게 아닌지 의심한다. 좀 과장하면 정사正史가 아니라 야사野史에 가깝다는 말이다. 22장의 도입부와 결부를 읽으면서 ‘뜬금없이’라는 부사를 잘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의”(1절. 무슨 일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하느님 야훼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내렸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의 손을 잡고 길을 떠난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함이었다. 백 살이나 되어 겨우 아들 하나를 주신 하느님이 이제 정을 붙일 만하니까 도로 달라는 것이었다. 아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들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는지요?”
“야훼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8절)

차마 ‘네가 오늘 장작 위에 올라갈 예정’이라고 할 수 없었던 아비는 앞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걸어가면서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야훼께서 손수 마련하시리라고 에둘러 말했겠는가.

구약성서 신학자인 폰 라드는 소책자『아브라함의 제사』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묵상했다. 우리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한계들이 많이 놓여있다. 그 중에서 자식을 잃는 고통만한 게 또 있을까? 학교 다녀오겠다며 아침에 나갔던 아들이 저녁때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면 부모는 왜 이런 불행이 자신에게 닥쳤는지 울부짖으며 세상을 원망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실존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5천 년 전에도 같은 사정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브라함이고 아들의 이름은 이사악이었다.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 역시 아브라함의 제사에 주목했다. 그는 사실 나열식으로 단순하게 흘러가는 본문 뒤에 무엇인가 폐부를 찌르는 진실이 서 있으리라는 상상을 했고 자신의 상상을 화폭에 옮겼다.

‘아브라함의 제사’라 이름 붙여진 동판화(1655년)에 보면 늙은 아비가 한 손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들의 머리를 가슴에 감싸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동판화의 좌우가 바뀌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한 발상이다. 아비는 아들을 죽이는 순간까지 머리를 가슴에 안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무릎까지 단정히 꿇고 있다. 그 자세에선 어떤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침내 천사가 다가와 아비를 뒤에서 안는다. 칼 잡은 팔과 아들의 얼굴을 잡은 팔을 부드럽게 감싸며……..

독한 사람

그림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비록 아들을 죽여야 하는 처참한 상황이지만 마지막까지 아들을 사랑한다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노력한다. “아들아, 내가 비록 너의 목에 칼을 대지만 이는 나의 뜻이 아니란다.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분은 나의 주인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구나. 왜 너를 죽여야만 하는 지 미욱한 아비의 머리론 알 수 없지만 그 분이 원하시니 아비는 따를 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기억해라. 아비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제 네 목에 칼을 꽂겠다.” 아비의 고통을 짐작하듯 아들은 다소곳하다. 아비의 진실은 아들에게 통한 것이다.

실존철학자 키엘케골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인간 실존의 한계를 읽어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절대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 예라는 설명이다. 어느 날 자식의 뜻하지 않게 죽고 말았는데, 그 때 아버지가 겪은 경험이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불행을 당한 모든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키엘케골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만약 아브라함이 의심을 했더라면 그는 진실로 다른 위대하고 훌륭한 행위를 했을 것이다. 그는 모리야 산으로 가서 나무를 패고 쌓아 올린 장작에 불을 지피고는 칼을 뽑고 하느님에게 외쳤을 것이다. ‘이 제물을 업신여기지 마소서.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은 못되나이다. 저도 아나이다. 늙은 몸이 언약의 아이에 어찌 비기겠나이까. 그러하오나 저로서 바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나이다. 이사악이 이 일을 결코 알지 못하게 하소서. 젊음을 그늘 없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제 가슴을 뚫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돌리려고 사정하지도 않았다.”(『공포와 전율-도덕의 정지, 인간의 실존』)

아브라함은 한마디로 독한 사람이다.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도 어찌 ‘왜 하필이면 제 아들을 바쳐야 합니까?’라는 질문 한번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묵묵히 길을 나섰고 결국 자식의 목에 칼을 꽂아야 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만일 명령대로 실행해 자식의 목에 칼을 꽂았다면 아브라함의 기운도 소진해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실행했다. 적당한 때에 천사가 나타가 자신을 제지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천사를 돌아보는 아브라함의 표정은 ‘아이고 다행이네!’가 아니라 ‘누가 방해하지?’하면서 내보이는 절망의 느낌이다. 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아름다운 노년

나이가 들수록 몸은 하루하루 쇠약해 가고 얼굴을 쭈글쭈글, 추진력도 젊은 시절과 영 다르고 작은 일에 노여워지기 십상이다. 거기다 치매까지 찾아오면 그나마 삶마저 극도로 초라해져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죽고야 만다. 아무리 용한 의사와 건강원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어도 결코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날이 갈수록 죽음의 진실이 주는 중압감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그래서 “진실은 무거운 것이라 젊은이만 질 수 있다.”(『탈무드』)고 하는가?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더라도 노년을 찬양하긴 어려운 노릇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력은 떨어지고 세상과도 멀어진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일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눈이 점점 밝아지고, 그와 반비례하여 한 때 중요하게 여겼던 신념들은 점점 더 그 빛을 잃어간다는 사실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돈도 명예도 사랑도 자식도 다 부질없는 게 되고 만다. 그처럼 다 사라지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백 살이나 먹은 아브라함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을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한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소리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그를 부르셨다.”(11절)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누군가를 부를 때 꼭 그 이름을 두 번씩 호명하는데 이 관행을 예수도 그대로 따라한다(마태 23,37; 루가 13,34;22,31).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름에 즉시 대답했다. “예,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에겐 하느님의 부름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노인들에게는 나이가 들면 저절로 들릴 것 같은 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거동도 불편한 재벌사 창업주가 재산 싸움에 서로 등을 돌린 아들들 사이에 난감하게 앉아있던 모습이 기억나고, 죽을 날 받아놓고 급한 맘에 철없는 아들에게 서둘러 자리를 물려준 북쪽 지도자도 생각나고, 한치 앞의 자기 운명도 모른 채 술판을 벌이다 총 맞아 죽은 독재자도 떠오른다.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에게 노년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