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아름다운 노인 바울로

아름다운 노인 바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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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인 바울로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필레 12-14절: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를 내 곁에 주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한 생각도 있었지만 그대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구약성서 노인들 중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노년의 삶에 귀감을 삼기 위해서였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에도 노인들이 다수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딱히 노인의 특징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저 원로로서, 종교지도자로서 사회 전반에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정도이다. 이를테면, 아리마테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추종했던 최고회의 의원이나, 혹은 그 반대편에서 예수님을 공격했던 이들 중에 노인들이 상당히 많았을 텐데 그들에게서 딱히 노인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해내기는 어렵다. 신약성서의 노인들도 구약성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차원을 십분 고려해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서의 노인들을 장황하게 거론하다가 자칫 평범하게 노년을 찬양하는 글이 될지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인물이 사도 바울로이다.

바울로는 평생을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했고, 초대 교회 문헌에 따르면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다가 결국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 사도 바울로가 인생의 말년에 쓴 편지가 바로 필레몬서다. 영어囹圄의 몸인 바울로는 자신의 시중을 드는 노예 오네시모를 위해 정성 깃 든 편지를 썼는데 솔직함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는 묘하게도 무엇인가 우리 삶에 직접 닿아있는 듯 익숙한 냄새까지 풀풀 풍겨 나온다. 우선 바울로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필레몬에게

바울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감옥에 갇힌 처지에서 편지를 썼다. 이제 나이가 들을 만큼 들었고(9절) 지병 때문에 오랫동안 신체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갈라 4,13-14; 2고린 12,7-8;10,10). 게다가 옆에서 이렇다하게 그를 돌봐줄 가족도 없는 듯 했고, 유일한 도우미라곤 평소부터 잘 알고 지냈던 필레몬(골로사이 교회의 지도자?)의 노예 오네시모뿐이었다. 그런데 오네시모의 처지가 딱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도망쳤거나(11절) 재정적인 손해를 끼쳐 쫓겨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18절). 잘못하다간 주인에게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 처지란 게 다 그렇다는 말이다. 바울로는 오네시모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권을 가진 필레몬의 허락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아마 바울로는 오네시모에게 파피루스 종이 한 장을 구해오라고 했을 것이다. 필레몬서의 분량이 딱 파피루스 한 장에 들어갈 정도라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펜을 들기 전에 얼마간 고민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지 필레몬의 맘을 녹여낼 수 있을까?

편지를 읽으면서 바울로의 의도가 불분명해 보이는 대목들이 몇몇 있다. ‘명령을 할 수도 있지만 부탁을 한다.’, ‘(오네시모가) 그대에겐 쓸모없지만 나에겐 쓸모가 아주 많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에서 비롯되기를 바란다.’, ‘오네시모가 진 빚이 있으면 갚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당신이 내게 빚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 덕 좀 보겠지만 그대의 순종을 확신한다.’, ‘꼭 찾아갈 테니 방 하나 마련해달라’ 등등. 바울로는 필레몬과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이렇게 존중과 무례가 공존하는 편지를 썼을까?

바울로는 그리스 수사학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삼대 수사학으로 불리는 유비론, 우화론, 예형론 외에도 대인논법(디아트리베: 로마 3,1-8), 수미쌍관법(인클루시오), 논리를 전개하다가 한 템포 쉬어가는 여담餘談기법(디그레시오: 1고린 12-14장), 윤리 명령에 종종 등장하는 직설법/명령법에도 능통했다. 이 편지에 사용된 방법은 이른바 모순어법(옥시모론)이라는 것으로 의미가 상치하는 두 개념이나 문구를 조합해 특별한 표현을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이를테면, 이육사의 시 ‘절정絶頂’에 나오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에는 강철과 무지개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묶어 조국 광복을 향한 시인의 강렬한 의지를 표현한 바 있다.

노인 바울로

바울로는 필레몬의 동의를 받아내려 고도의 심리 전술을 사용한다. 명령과 부탁, 강요와 자의自意, 쓸모 있음과 없음, 빚과 덕 등등.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살려주면서 자신이 얻어내려고 하는 바를 취하기 위함이다. 아마 펠레몬은 바울로의 편지를 읽고 나서 ‘사도께서 거절하기 힘든 부탁을 하시는구먼!’ 하며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일이다.

필레몬서에서 만나는 바울로는 맘이 넓은 사람이다. 그에게 오네시모의 전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형제가 된 이상 그를 정성껏 보듬어줄 뿐이었다. 그러니 오네시모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또한 바울로는 신중한 사람이다.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긴 한데 필레몬의 선처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필레몬에게 명령하는 대신 설득의 길을 택했다. 필레몬이여, 제발 오네시모를 어여삐 여기소서!

바울로의 젊은 시절은 이와 달랐다. 바울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동료 전도사들을 비난했고(2고린 11,11-15), 교우들을 어린 아기 취급하는 것(1고린 3,1-2)도 모자라 종종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2고린 11,12). 그러고도 지적 우월감이 목에까지 차 있어(갈라 3장) 교회 어르신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곤 했다(갈라 2,11-14). 아마 1세기 교회의 모든 좌충우돌은 바울로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갈라디아서와 고린토전.후서 등 바울로의 초기 편지들에서 칼날이 느껴지는 반면 필레몬서에는 여유와 관록이 느껴진다. 노년에 이르러 터득한 관조의 지평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필레몬을 압박하는 차원도 예전과 사뭇 달라 보인다. “곧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그 때 당신이 나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필레 22)

편지를 읽고 나서 필레몬은 틀림없이 오네시모에게 해방(속량)의 기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편지를 읽자마자 곧장 오네시모의 손을 붙잡고 (노예해방에 필요한 수수료 격인) 속전을 바치러 신전으로 향했을 테니 말이다.

성서의 노인들에 대한 일반론 대신에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노인인 바울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것도 바울로의 전체 인생에서 극히 일부만 둘러보았을 따름이다. 고작 바울로의 편지 한 장이 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바울로가 살아온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익한 내용들이다.

비록 스스로 늙은이라고 밝혔지만 바울로의 편지에는 젊은 기운이 펄펄 살아있다. 사랑하는 수양아들(10절) 오네시모를 위해 결코 식지 않을 열정을 보여준다. 오네시모를 거절하는 것은 곧 바울로를 거절하는 것이며 바울로를 거절하는 것은 주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좀 보려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에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20절)

종심소욕불유구

일찍이 공자는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우리가 흔히 나이 예순이면 이순이라 할 때는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예순 살만 되면 자연적으로 귀가 부드러워져 어떤 말이든 다 수용하고 어떤 비판에도 분노하지 않는가? 필자가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도통하지 않은 경우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욱 작은 일에 상처받고 별일 아닌데도 노염을 품고는 한다. 그러니 ‘육십이이순’은 나이도 이제 먹을 만큼 먹었으니 제대로 된 사람 구실 좀 하라는 성현의 충고쯤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공자는 예순이 지나 일흔이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즉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세상사 돌아가는 문리를 터득했으니 모든 언행이 자동적으로 이치에 들어맞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뜻이다. 성현 앞에서 다시금 부끄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필레몬서를 읽어보면 바울로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갔으나 결코 길을 벗어나지 않았던 인물로 보인다. 신앙 안에서 내면의 평정에 도달했으니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측은히 여기는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고 필레몬을 설득하는 부분에서는 불필요한 격식에서 벗어난 솔직함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나름의 삶과 수고를 통해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깨달아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경지에 도달했다고나 할까?

우리의 노년도 바울로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바로 그런 차원에서일 것이다. 마침 TV에서는 워싱턴에서 물의를 일으킨 오십대 후반의 전 청와대 대변인 보도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