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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권리]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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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권리]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루가 19,39-40: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대한문

직장이 가까워 대한문 앞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 그 때마다 답답한 풍경을 만나는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과 이를 막는 공권력의 대치 모습이다. 특히, 몸싸움이라도 벌어져 고성이라도 오갈 양이면, ‘서로 원수진 것도 없는 사람들끼리 왜 이래야만 하나’라는 생각에 안타까워진다. 한 때는 대한문 왼쪽으로 이어진 덕수궁 담을 따라 천막들이 장사진을 이뤘었다. 그러나 요즘은 덕수궁 담 앞에 반달 모양의 꽃밭이 조성되면서 공간이 좁아지자 시위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대폭 줄어들었다. 대신 하루 한 번 씩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곤 한다. 촛불 집회 때 수 백 명 씩 모여 미사를 지낸 것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아무튼 지속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끈기만은 대단하다.

예수는 공생활 초기만 해도 제도권 유대교의 질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이라면 어차피 모두들 그렇게 살았으니 예수도 달리 길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예루살렘 대성전에 찾아가 제사를 드리고 순례의 의무를 다하고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일 등이다. 그래서 어느 청년이 예수에게 다가와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묻자 서슴없이 예수는 십계명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던 예수에게 큰 변화의 사건이 찾아온다.

제도권이여, 안녕

마르코복음 6장 1-6절에 따르면 예수가 고향에 돌아가 회당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회당에서 먹혀들지 않았고 예수는 고향을 떠나게 된다. 물론 이 사건 전에도 예수가 회당을 찾았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되지만(마르 1,21;3,1) 묘하게도 고향에서 박대 받았다는 기록 이후로 예수가 회당 예배에 참여했다는 보도가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작가 마르코의 편집의도를 읽어볼 수 있는데, 일정 시점부터 예수가 제도권 유대교에서 등을 돌렸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마르코의 편집 의도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적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가 제도권 유대교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격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단순 명료한 예수의 선포(마르 1,14-15)는 복잡한 구원의 매뉴얼을 가졌던 제도권 유대교의 가르침과 천양지차였다.

의인과 죄인이라는 계층적 사고에 빠져있던 유대교에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회당에서는 예수를 밀어냈을 것이고 예수 역시 더 이상 예배 장소를 회당으로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그분의 예배장소가 되었다. 즉, 재야의 종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에게 모여든 군중!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하고 억울한 처지를 몰라주는 제도권 유대교 보다는 광야에서 외치는 예수의 소리에 훨씬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 우렁찬 소리를 좇아 광야로, 광야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몰려든 군중들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좌표는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다. 예수와 같이 했던 제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태생적으로 단결이 힘들다는 느낌을 든다. 참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 졌는데, 이를테면 세리(마르 2,14=마태 9,9에 나오는 ‘마태오’ 세리)는 이스라엘에서 오랜 동안 천한 직업으로 취급받았고, 시몬이 속해 있던 혁명당원(시몬)은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당파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앞잡이이자 민족의 배신자인 세리와 반로마 세력인 혁명당원이 12제자에 함께 포함되어있었다는 점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갈릴래아 촌에서 올라온 어부와 대사제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고위층 인사가 동행하는 것도 당시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요한 18,15-16).

예루살렘으로

그런데 도대체 예수는 어떻게 이런 무리를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을까? 언젠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자 예수는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 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는 결코 제도권 유대교에 반대하여 또 하나의 고착된 체제를 만든 분이 아니다. 예수는 순수했던 야훼 신앙이 제도권 유대교의 그림자에 가려 참 빛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스스로 공동체를 만든 분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제도권을 등지고 평신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는 뜻이다. 그분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실한 의미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기도 하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지 하느님은 누구나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모든 세상 가치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 나라 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 예수가 바라던 이상적인 공동체였다. “예수와 더불어 제자들이 이루는 생활 공동체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였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와 똑같은 고난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정도까지를 의미한다.”(로핑크, 같은책 61쪽)

예수를 통해 평등과 자유를 경험한 공동체, 그리고 이제는 한 가족으로 공동의 운명을 나누어 갖게 된 공동체는 그분과 함께 길을 떠난다. 거칠 것 없는 행진이었다.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는 종교지도자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평등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란 낯선 개념이었다. 특히 죄인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대단히 불편한 것이었다. 예수는 죄인들에게 평등을 가르쳐 주었고 자유를 선물로 주었다. 죄인도 종교지도자나 다를 바 없이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그 엄청난 군중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내내 그분의 주변을 지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가의) 죽음의 행진에도 동참했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해 예수와 함께 죽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예수로부터 받았던 큰 감동만은 마음 속 깊이 간직했으며, 그의 부활 이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나게 된다(사도 2,1-12). 제도권 유대교와 예수의 대결이라는 맥락으로 보았을 때 예수가 이룩한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 주체였음은 분명하다. 열 두 제자의 상징성은 그 같은 예수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안병무 박사는 이 공동체 운동을 두고 예수를 수장으로 민중들이 일으킨 ‘반反예루살렘 운동’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다(『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1993, 221-240쪽).

단결권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당신은 성난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다시는 노예가 되어 살지 않겠다는 그들의 노래. 심장이 박동치고 북소리가 화답하면 우리의 삶도 내일을 향해 그 첫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당신도 우리의 행진에 참여하라. 그래서 나와 함께 강해질 수 있겠는가? 그렇게 원했던 저기 바리케리이드 뒤편의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자유를 향한 행진에 참여하라.” 혁명을 앞두고 단결을 호소하는 노래 가락이다.

글 앞에서 대한문 이야기를 꺼냈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거리에 나섰는지 그 자세한 배경은 알지 못한다. 시위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아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예수에게 모여든 이들도 마찬가지로 모두들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하혈병 때문에, 18년 동안 등이 굽어서, 뇌졸중으로 20년이나 누워 지내서 등등. 그러나 이런 자질구레한 갈래 갈래의 사연들도 뭉치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다.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단결’이라 부르고 프랑스어로 solidaritė, 독일어로는 Solidaritaet 라 하여 주로 노동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구호는 비단 노동현장 뿐 아니라 각종 시위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시위 현장에 내걸린 강력한 팻말 구호들을 보면 문득 문득 30년 전쯤에 대학가 데모에서 즐겨 불렀던 “자,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라는 노래도 떠오르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하층 계급이나 진보 세력의 단결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참여정부 시절에는 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 세력들 역시 단결을 앞세워 거리시위를 벌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단결은 누구나 행사할 수 있는 중립적인 권리라 할 수 있다. 그 점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살아생전 종종 추종자들의 단결을 호소했다. 비록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 홀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거두었지만, 제발 힘을 합쳐보자는 예수님의 호소는 세월을 넘어 교회로 전달되었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하다.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끝으로 단결권의 교과서적 정의인 세계인권선언을 인용한다.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 또는 신념을 바꿀 자유, 단독 또는 타인과 공동하여 공적 또는 사적으로 포교, 행사, 예배 및 의식을 통하여 종교나 신념을 표명할 자유를 포함한다.
20조: 1.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2. 누구도 결사에 소속할 것을 강요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