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연중 20주일 루가 12:49-56 (오동균신부, 대전주교좌교회)

연중 20주일 루가 12:49-56 (오동균신부, 대전주교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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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을 지르러 왔다

 

원어의 맥락으로 직역하자면 “나는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이 불이 이미 붙여졌다면 내가 더이상 무엇을 하려고 하겠느냐?” 즉 아직 불이 붙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직 붙여지지 않은 불을 지르러 온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를 가리켜 구세주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명칭은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구세주라는 등식은 예수=메시아=그리스도라는 고백에서 왔다. 그러나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이 곧 그가 구세주라는 말은 아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메신저이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그 뜻을 이룩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하는 구원행위는 곧 심판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구원사역은 심판사역과 함께 이해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바로 불을 지르러 왔다는 그의 언어에 내포되어 있다.

불을 지르면 타올라야 할 것은 타오르고 재로 변해 없어질 것은 없어지게 되는 과정이다.

역사에서 구원이란 역사적 심판의 과정을 거쳐 이룩된다.

역사적 죄는 규명되어야 하고 심판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역사 속에서 신음하던 백성이 구원받는다.

어떤 역사에서든 자동구원은 없다. 마치 진공상태에서 구원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듯이 말하는  구원교리는 허무한 외침에 불과하다.

 

로마 가톨릭 교종 요한 바오로2세는 지난 2천년간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쳤다.

이것은 교회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기존의 교리체계를 내려놓고 실체를 인정하고 역사를 인정하는 선언이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복음이며 고백이 되었다. 이러한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무오설에 안주하던 교회의 기득권자들에게는 불세례가 된 것이다. 실제 로마가톨릭은 역사적 범죄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심판하지는 못하였다. 심판자로서의 예수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아직 자신이 심판자라고 생각할지언정 자기 스스로가 심판받을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친일파들은 아직도 심판받은 적이 없고 제거되지도 않았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나치에 부역한 자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범으로 법정에 세웠고

맨 처음에 가장 강력하게 처벌한 것은 언론부역자들이었다. 바로 나치의 범행을 가리고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 책임이 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원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바로 이 땅에 던져진 불이었다.

그것은 역사적 심판의 과정이며 그것까지 하느님의 영역이다.

 

 

2. 내가 받아야 할 세례,

이 말을 직역하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세례되어야 한다.” Baptism that I have should be baptized,  즉 내가 받아야할 세례는 즉각 행해져야 한다.

“이 일을 다 겪을 때까지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kai hos sunekomai eos otou telesthe(how am I straitened until it will be accomplished)

 

세례는 무엇인가?

예수에게 세례는 고통이며 죽음이다. 어떤 것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며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거기에서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쉬네코마이”라는 히랍어는 꽉 붙잡혀 답답한 상황을 말하고 있다. 예수가 받는 세례는 어떤 것이 완성될 때까지 꽉 붙들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답답함을 계속될 것이다.

 

예식에서의 세례는 물속에 잠깐 들어갔다가 물 위로 나오는 행위를 보여주지만

물 속에 들어갈 때 완전히 죽는 것을 상징한다.

완전히 죽을 때까지 물 속에 집어넣고 누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완전히 죽어 축 늘어지게 될 때 물위로 올라와 새숨을 쉬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질곡(柣梏)을 견뎌내야 한다. 삶은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삶은 자기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지 남에게 지워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짊어진 삶의 질곡은 나만 지면 끝나는 것이라면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모순으로 갈라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나여야 하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내게 되는 본능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평화를 가져오기 보다 분열을 가져왔다고 선언한다.

 

세례는 분열을 겪는 것이다. 나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분열을 겪는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떠나 보내야 하는 아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아픔

나를 죽이고 내려 놓아야만 하는 아픔이 세례의 과정이다.

 

 

3. 기독교는 자신을 부정함으로 자신을 얻게되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유대교의 할례는 자기의 살을 일부 잘라 피를 내는 과정을 거쳐 자기 자신을 일종의 제의적 희생제물로 바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제물로 바쳐질 만큼 깨끗하다는 것이며, 깨끗하기 때문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을 증표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20세기말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는 할례를 피흘림이라는 상징으로 보고 자신의 내면을 가차없이 벗겨내는 치욕의 과정으로 해석하였다. 자신의 이중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드러냄의 과정이 바로 할례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고백의 문제로 연결된다.

 

자신을 고백하는 것은 치욕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런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지식에 이르게 된다. 할례가 자기 살을 찢고 잘라서 내면에 흐르는 피를 흘러내보내는 과정이라면 이것은 자신의 내면성을 열고 개방하여 외부세계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고백이란 바로 이런 개방성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이며 이것은 내면적 자기 주장만이 아니라 외부적 타자의 시선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던지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내 던지는 것이 고백이다. 이 고백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타자와의 진정한 교류를 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와 자신과의 진정한 교류 안에서만 진정한 지식이 가능하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이런 고백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우리는 왜 하느님에게 고백할까?” 하느님이 이미 다 아시는데 왜 굳이 고백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미 내 안에서 내 스스로 전지전능의 영역으로 있던 내면적 지식을 외부로 노출함으로써 타자들의 평가에 던져넣는 자기 부정의 지식이 고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 나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기 이전에 이미 나에 대해 나의 전지성이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백해서 토설해 내지 않으면 이것은 내안의 전지전능성의 벽에 가두어 두는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에서 이러한 자기 중심적 믿음을 강한 믿음이라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학적 지식도 모두 자기 중심적 지식을 가지고 열거해 놓으므로써 듣는 사람들의 참여를 배제하는 , 또는 주변으로 밀려난 청중들의 비판과 참여를 배재하는 우리들만의 설교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의 판단과 자신의 승인에 의해 믿고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방하므로써 자신의 제어권을 타자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이 고백의 종교적 특징이다.

 

데리다는 이것을 자기의 고백이 자신의 기도가 되고 자신의 눈물이 되는 지식이라고 말했다.

존 카푸토의 <데리다의 기도와 눈물>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철학이 품고 있는 종교적 풍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없는 종교이며 현실태의 종교적 경향을 부정하는 종교였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기독교의 진실로 돌아가야 한다.

고백의 기독교, 자기 개방과 자기 포기의 기독교,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이다.

 

 

3. 한국교회의 현실과 미래교회의 전망

한국교회는 병들어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위기라고 하지만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병이 들었기 때문에 병의 한 현상인 것이다.

과잉욕구로 비대화된 교회를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이제 비대화된 병도 시들해져 죽어가고 있다. 어느 순간 교회는 쪼그라들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질러야 할 불을 지르지 못하니까 비대화되었고 그래서 죽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받아야 할 세례를 받지 못하므로,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도 못한다.

한국교회는 일제말 한국민족의 자주 독립노선과 결별하는 순간 그 병은 시작되었다.

일제 말 신사참배로 정신을 병들게 했고

해방 이후 해방공간에서 제 갈길을 찾지 못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과잉욕구에 한국기독교회는 잡아먹혔다.

전쟁구호물자를 나누어 주는 자로서 물질적 권력을 쌓았고 그 위에 남한 기독교회를 세웠다.

정치적 모리배들과 야합함으로 온갖 모략의 온상이 되었다.

 

4.19 이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의로운 기독교인들에 의해 구원될 여지가 있었으나

모략질과 수탈에 앞장서온 지도자들의 잘못을 그대로 이어받고 한국역사에서 극복해야할 친일문제를

반공문제로 뒤덮어버리는 오류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서

민족기독교로서의 길을 버렸다.

이제 한국기독교는 미래세대에게 버림을 받고 온갖 사이비 이단종파로 갈라져 나가는 수모를 겪고 있다.

앞으로 50년 후 한국기독교는 조그만 소종파교회로 전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

세상에 불을 지르는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성공회가 이런 불을 지를 수 있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한국교회는 병들어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위기라고 하지만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병이 들었기 때문에 병의 한 현상인 것이다.
과잉욕구로 비대화된 교회를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이제 비대화된 병도 시들해져 죽어가고 있다. 어느 순간 교회는 쪼그라들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질러야 할 불을 지르지 못하니까 비대화되었고 그래서 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