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연중 31주일 설교문 (오동균신부, 대전주교좌교회)

연중 31주일 설교문 (오동균신부, 대전주교좌교회)

911
0
공유

인생역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삶에서 무언가 계기가 되어 새로운 인생으로 접어드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큰 변화, 또는 갑자기 권력을 잡은 사람이 되었다든지,

예기치 않은 명예를 누리는 그런 경우에 주로 인생역전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잘 나가던 인생이 갑자기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 사건, 자기 실수 실패로 인해 아주 어려운 지경으로 떨어지는 경우에도 인생역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인생역전을 겪는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잡이 배에서 일하던 자기 직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그외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은 예수와 만나서 지금까지의 인생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삶을 버리고 그를 따르는 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인생역전이 된다. 자캐오 또한 예수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루가 복음에서 보여주는 자캐오의 이야기는 이러한 인생역전의 순간에 심리적 변화의 과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자케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게 될 것인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예수와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교훈을 얻기 바란다.

먼저 자캐오는 <돈 많은 세관장>이었다. 세관장이란 로마를 대신해서 세금을 걷어주는 직업이었다. 현대국가에서 세금은 국가의 중요 사무이고 세금을 걷는 것은 공무원이라는 신분이었지만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이민족 로마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치욕이었고 야훼종교의 신성모독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성전권력은 로마로 세금을 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지만 백성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실제 유대지역의 반란은 세금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반란이 많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관이 되었다는 것은 로마의 앞잡이요 민족의 반역자 하느님을 모욕하는 직업이었다. 이런 일은 결코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했던 자케오에게 호구지책으로 선택했지만 스스로에게도 매우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위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그 일을 해야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유대교의 신앙전통으로부터 배제되었으며 스스로도 감정적 부정을 해왔을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축재로 자신을 보상했다.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만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힘이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돈(로마의 화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케오를 더욱 혐오했다. 출신 공동체로부터 근본적인 거부를 당하고 혐오를 받고 있으면 그의 심리적 상태는 매우 위축되어 있을 것이다.

두번째,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군중에 가려 있었다. 위에서 말한 심리적 위축상태와 키가 작다는 외모는 의미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그것의 결과는 관계의 단절이었다. 예수를 보고 싶었지만 군중에 가려 예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는 키가 작았다고 한다. 키가 작다는 희랍어 표현은 헬레키아(heelikia) 미크로스((mykros)인데 헬리키아는 키뿐 아니라 나이, 혹은 성숙도를 말하는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은 마음의 성숙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군중들에게 가려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마음의 성숙도, 즉 위축된 마음은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교감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심리적인 벽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군중이다. 이러한 심리적 관계장애가 자캐오의 심리적 상태였다

한국 성공회는 그 크기에 따라 성공회 교인들의 심리적 위축, 혹은 열등감에 쌓여있다. 그래서 성공회는 늘 그 사이즈에 갇혀서 사고 하고 그 사이즈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질적 성장은 어느 정도의 사이즈일까? 목회를 열심히 하고 교인들이 열심히 전도하면 성장이 될까? 그동안 우리는 많은 프로그램을 도입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작은 대신 질적으로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라고 위안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을까? 실제 성공회 교인들이 자랑하는 예배가 아름다운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예를 아름답게 드려본 경험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성공회 교인들은 이미 마음 속에 그 어떤 벽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지만 성공회 교인들은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심리적 장벽이며 열등감이다. 나는 자캐오를 보면 한국성공회의 심리적 열등감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고 성장만 주장한다고 성공회가 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심리적 장애로 부터 해방을 경험하고 거기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일이다.

다시 자케오로 돌아오자.

세재, 자캐오는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가 갈 길을 미리 앞서나가서 자리를 잡았다. 돌 무화과나무(sycomore, ‘쉬코모레오란 이집트 무화과를 말한다고 한다.) 위에 올라가 예수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예수와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어떤 구조물을 필요로 하는 태도이다. 또 예수의 길을 예측해서 앞질러 나가는 모습에서 심리적 장애를 가진 자의 행동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직접 예수와 만날 자신이 없으니 용기를 내는 대신 즉 자기 자신의 장벽을 넘어서 가는 대신 예측하고 앞질러 나가는 행동을 하게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아니 신앙 이전에 삶의 태도가 왜곡되고 장애를 가지게 되면 나타나는 행동이다.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과 양태는 이러한 결손과 장애 때문에 쓸데없는 예측(상상)과 행동, 그리고 장치를 필요로 한다. 나 자신으 있는 그대로의 삶, 즉 자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실현하기를 두려워하고 피해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열등감으로 인해 문명이 발전하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속적 삶의 모든 요소는 이러한 열등감으로 인한 부수적 문화, 생과 직접 관련이 없는 주변적 우수리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매달려 기도한 적이 있다. 나의 영적 상태에서 돌무화과나무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잡다한 지식이었다. 책을 통해 예수를 보려고 하고 잡다한 지식으로 치장된 예수를 예수라고 믿는 나의 신앙상태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 나는 어려서부터 책이 심리적 도피처였다. 어른들의 눈에는 그것이 모범생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도피처였음에 틀림없다. 나의 실재(reality)와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 그 중에서 지적인 현란한 논리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단순하고 솔직하고 살아있는 언어를 잃어버리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현학적 태도에 매달렸던 것이다.

네번째, 그러나 자캐오는 그곳에서 예수와 눈길이 마주치는 경험을 한다. 아니 예수는 그러한 자캐오에게 눈으로 다가서신다. 평지에서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눈길을 따라가시는 예수님은 자캐오와 눈을 마주치신다. 그 때 자캐오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는 바로 그에게 자캐오야!”하고 부르신 다음 내려오라고 말씀하신다. 어디서 내려와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그래서 자캐오는 내려왔다. 자캐오의 인생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인생역전의 계기는 눈길이었다. 눈길이 마주치고 자캐오야하고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시작되었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인생역전의 계기가 있다. 그러나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흔한 불행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기회, 눈길의 마주침의 기회에 예민해지고 그 기회를 알아차려야 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쉽게 지나쳐버리고 마는지! 자캐오는 금방 알아들었다. 그리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누구나 이런 기회는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오늘은 네 집에 머물러야겠구나하시는 그 분을 모셔들이지 않는 사람은 바로 나다.

다섯번째, 자캐오는 인생이 바뀌었다. 그 한번의 만남으로 이제까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고 결손으로 시달리며 주변 사람과 벽을 쌓고 살던 자신을 바꾸어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로 결단한다. 새로운 삶은 선택한다고 자기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내것으로 하기 위한 결단을 해야 내것이 되는 것이다. ‘내 재산의 절만을 내놓고 이제까지 내가 속여먹은 것의 네배를 갚겠다는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