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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성지순례1] 옥스포드 순교자 기념탑 Oxford Martyrs’ Mem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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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성공회 성지순례 1회]
옥스포드 순교자 기념탑

Oxford Martyrs’ Memorial

본 사진과 원고는 2013년 영국성지순례를 다녀온 윤지상(요한)이 찍고, 썼으며, 주성식(모세) 신부님이 감수했습니다.
영국의 대학도시 옥스포드에 가면 고딕양식의 기념탑 하나가 높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메리 여왕의 구교 환원에 동의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틴 세 명의 사제,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Thomas Cranmer, 1489~1556), 휴 라티머 주교(Hugh Latimer 1483~1555) 그리고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Nicholas Ridley, 1500~1555)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입니다. 초기 영국 성공회 역사에서는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이 세 분의 순교가 없었다면 성공회의 희망도 시대의 무게에 눌려 희생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옥스포트 순교자 기념탑
순교의 배경

메리 1세 여왕은 헨리8세의 딸로 어머니는 헨리8세와 이혼한 캐서린 여왕입니다. 이로 인해 헨리8세의 종교개혁 시기 그녀는 암울한 성장기를 보냈으나, 이복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서거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종교개혁을 철저하게 경멸하며 구교로의 회귀를 시도합니다. 그녀의 통치 기간 화형 당한 사람만 288명에 이르러 ‘피의 여왕 메리(Bloody Queen Mary)’라고 불렸습니다.
(맨 위부터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 휴 라티머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 - 헨리8세 서거 이후에는 흰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휴 라티머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
헨리8세 때부터 로마와의 대립에 앞장서며 종교개혁을 이끈 고위 성직자는 메리 여왕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죠. 결국,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리들리 주교와 라티머 주교는 악명 높은 런던탑에 수감되었으며, 크랜머 대주교도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수많은 신교도가 영국을 탈출했지만,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순교의 과정

크랜머 대주교와 리들리, 라티머 주교는 옥스포드로 이송되어 성직자와 학자로 구성된 위원회와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재판을 위한 형식적인 행위였지만, 이곳에서 옥스포드의 학자들은 비신사적인 태도로 그들을 겁주고, 불순한 언사를 남발하는 등 치욕적인 대접을 했습니다.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s Church)에서 행한 재판에서 이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후 1555년 10월 16일 리들리와 라티머 주교는 잔인한 화형식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크랜머 대주교는 그 영향력을 고려해 회유와 협박이 이어지다 결국, 개종 서류에 서명까지 했지만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메리 여왕의 명령으로 1556년 3월 21일 옥스포드 벨리올 칼리지(Bailliol College) 앞에 있는 거리에서 화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벨리올 칼리지 앞 거리에 있는 화형 장소)
순교자가 화형 당했던 장소
                 
리들리와 라티머 주교의 순교
감옥 생활과 나이로 인해 몸도 구부정하고 허약했던 라티머 주교가 화형대에 오른 후 사람들을 향해 힘차게 일어섰다고 합니다. 정의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스스로 택한 길에 들어서자 청년처럼 늠름하고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형 당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화약주머니를 몸에 달아줍니다. 당시 리들리 주교의 매제가 그 역할을 했고 곧이어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참혹한 순간에도 라티머 주교는 리들리 주교에게 “편안한 안식을 얻기 바라겠소. 리들리 경”이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우리가 신의 뜻에 따라 영국 땅에 밝힌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오!” 그 다음 마치 불에 손을 씻는 듯한 모습을 한 후, 다시 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외친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리들리와 라티머 주교의 순교 기록)
그러나, 라티머 주교는 다리 부분만 타고 불이 꺼져 고통에 울부짖었고, 그의 매제가 불길을 다시 올려 오랜 고통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이 모든 계략의 맨 앞에서 구교로의 환원과 종교개혁에 앞장선 사제를 화형으로 몰아갔던 윈체스터의 주교 스테펜 가디너(Stephen Gardiner, 1493~1555)도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순교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에게는 죽음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여왕의 사주를 받은 사악한 자들은 그의 성격을 악용해 개종 서류에 사인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여섯 번이나 말이죠. 그의 영향력을 고려해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그에게 마지막 설교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다 찢겨지고 더러운 옷을 입은 채 그가 설교단 맞은편에 세워진 볼품없는 연단에 오르자 사람들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는 먼저 무릎을 끓고 소매 춤에서 미리 준비한 기도문을 꺼내 큰 소리로 읽은 후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신도로서 왕에게 복종해야할 의무가 무엇인지, 부자가 왜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메리 여왕 측 사람들은 이때만해도 크랜머 대주교가 구교를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설교 마지막에 자신이 서명한 것을 뉘우치며 종교개혁적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어 자신의 오른손이 그 못된 서류에 서명 했으므로 화형을 당할 때 제일 먼저 오른손부터 태워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화형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불길이 당겨지자 크랜머는 자신의 마지막 선언대로 오른손을 불길 쪽으로 내밀어 “이 손이 부정한 행동을 했구나!”라며 그 손이 불에 그슬리고 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모든 거룩한 모습은 영국인 모두에게 강력하게 남아 후세에 전해지며 마침내 그는 영국 역사에 위인으로 남았습니다.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화형 장면)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필요하지 않지만, 그가 순교하지 않고 배교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성공회는 생각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의 순교는 영국을 다시 종교개혁의 국가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 기념탑의 설치

순교자 기념탑(Oxford Martyrs’ Memorial)이라 불리는 이 탑은 당시 젊은 건축가였던 조지 길버트 스캇(George Gilbert Scott)에 의해 시작되어 약 2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입니다. 뾰족한 첨탑 같은 형태를 지닌 탑으로 1841년 일반 기금 모금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그 잔인한 화형식이 벌어지고 약 300년이 지난 후 비로서 순교의 의지를 세기게 된 것입니다.
한편 옥스포드 벨리올 칼리지(Bailliol College) 벽에는 순교자를 기리는 석판이 붙어 있고, 그 앞 거리 바닥에는 십자가 형태의 표식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세 분의 순교자가 화형을 당한 장소라고 합니다. 순교자 기념탑에서 약 5분 거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