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밀양密陽

[영화]밀양密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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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양密陽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밀양

요즘 밀양이 뜨고 있단다. 남도지역의 교통요충지라는 장점을 살려 농촌 도시에서 기업도시로 변신을 꾀하는 모양인데, 시 전체가 상당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조선일보 2007년 6월 30일). 미루어 짐작하건대, 최근에 화제를 불러 모았던 영화 ‘밀양’이 어느 정도 모티브를 제공했을 것이다. 영화 한편이 지역 경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아직 보기도 전에 전도연의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가능한 한 선입견 없는 상태에서 영화 보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는데 그만 적절한 시간을 놓친 셈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밀양’(이창동감독, 극영화, 한국, 2006년, 142분)을 보고 난 첫 느낌은 밋밋했다. 무엇인가 분명히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뿌연 기운만 아른댈 뿐이었다. 이창동 감독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한 장면 한 장면 떠올려 보면서 영화를 차분하게 되씹어 보기로 했다.

영화 시작에 신애(전도연)가 종찬(송강호)에게 밀양의 뜻을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종찬은 비록 밀양密陽에 살지만 그 뜻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했고 외지인인 신애가 ‘비밀의 볕’이라고 한자 뜻을 풀이해 준다. 그 비밀스런 볕이 영화 속에서 세 번이나 인상 깊게 등장한다. 첫 번째는 신애가 밀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차가 고장 났을 때 카센터 사장인 종찬을 기다리면서 아들과 함께 쐬었던 햇볕이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신애는 해를 잠시 우러러본다. 비록 차는 고장 났지만 안정감과 평화를 주는 햇볕이었다.

두 번째는 유괴당한 후 살해된 아들의 차가운 주검을 마주했던 신애가, 그녀에게 교회에 나올 것을 간곡히 부탁하던 약국 주인에게 ‘도대체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 반문할 때 나오던 손바닥 한 뼘의 햇볕이다. 첫 장면과 비교할 때 해가 비치는 범위는 극적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신애가 손을 뻗자 그 마저도 반 토막 나버리고 만다. 세 번째는 자살 시도 후 병원에서 퇴원한 신애가 집에서 머리카락을 자를 때 카메라가 천천히 옮아가면서 잡아낸 햇볕이다. 그 햇볕은 이리저리 쓰레기들과 페트병이 널브러진 지저분한 마당 한 구석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영화 제목인 ‘밀양’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장면이었다.

신애의 절규

아들을 잃은 신애는 우연히 교회 부흥회에 나가게 된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는 신애에게 마침 뚜렷한 전기가 필요한 때였다. 신앙의 길에 접어들면서 마음의 안식을 얻은 신애는 자신에게 끔찍한 죄를 저지른 유괴범을 용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나 신애와 만난 유괴범은 오히려 감옥에 갇힌 후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노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자식을 잃고 유괴범을 용서하러 교도소까지 찾아갔던 신애에게 닥친 처참한 현실이었다. 신애는 그 상황에서 그만 혼절하여 쓰러지고 만다.

신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를 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나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그럴 권리를 내게서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그를 어떻게 다시 용서합니까?”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에 따르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신神의 섭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면 남은 이는 어떻게 되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죄인 자신은 회개하여 죄의 고통에서 빠져나가면 다행이겠지만 그 죄가 만들어 놓은 결과는 도대체 어떻게 정화淨化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죄와 용서

인간에게 ‘죄와 용서’ 만큼이나 보편적이고 난해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짓는다. 죄의 개념이 동서고금의 역사와 가치관에 따라 수없이 다양하게 정의 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인간은 죄를 짓는다. 특히나 죄는 종교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데 종교인이 됨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죄지은 인간에게 용서,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른바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구원’의 과정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종교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영화에서 신애는 교회를 찾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보면 ‘죄와 구원’의 문제를 두고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해왔는지 잘 알 수 있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와 그에 대한 보속補贖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고 연옥 煉獄과 지옥地獄 교리로 죽음 후에 인간이 처하게 될 운명까지 알려준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여서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정화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그 자체로 벌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그 정도로 죄와 구원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죄란 무엇인가? 죄를 짓고 안 짓고는 인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 지하철 역 계단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 한 푼 안 던져 준 것도 죄에 해당하는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입장에 따르면 죄는 우선 인간의 의지와 직접 관계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는 약점이 많은 가르침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오늘 하루, 전적인 나의 의지로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내에게 험한 말도 하지 않고 자식에게 손찌검도 하지 않았으며 고생하는 직장 부하들을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고, 심지어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은 죄가 용서되는가?

죄는 숙명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사도 바울로는 죄란 ‘구조적인 문제’라고 가르쳤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서 세일하는 악어가죽 핸드백을 1/3 가격에 사서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다고 쳐보자. 그 남자는 죄를 지었을까? 대단히 죄송하지만 말씀이지만 그는 죄를 지었다. 우선 멀쩡히 살아있는 악어의 숨을 끊었을 테고, 누군가 악어가죽을 가공하기 위해 작은 망치로 가죽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모루 질을 했을 것이다. 이 작업에는 아프리카 등지의 어린이가 동원되고 오랫동안 모루 질을 하면 관절염에 걸려 팔을 절단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독한 화학약품에 장시간 담가 두어야 가죽의 가공이 가능하다. 그러니 악어가죽 핸드백 하나를 사면서 생태 파괴, 어린 노동력의 착취 그리고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맘먹고 큰 돈 모아 선물을 산 천사 같은 남편이었다.

죄는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이, 마치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숙명이다. 따라서 숙명으로 주어진 죄인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하느님의 은총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유괴 살인범의 처지 역시 설명이 가능하다.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 살리기 위해, 빗나가기만 하는 딸을 바로잡기 위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원래부터 악인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범죄자로 만든 것이다. 그는 범죄 후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숙명처럼 빨려 들어간 죄의 소용돌이를 원망했다. 그러다가 하느님을 받아들였고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유괴범은 드디어 맘에 평화를 되찾는다. 때맞춰 그 순간에 신애가 면회를 왔고 유괴범은 자신이 누리게 된 용서와 평화에 대해 서슴없이 그녀에게 이야기 한다. 감옥에 갇힌 사람답지 않게 환한 얼굴로…….

사실 알고 보면 그 역시 구조적인 죄의 희생자였고, 하느님은 천인공노할 범죄자에게도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만일 유괴범을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면 관객들이 그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수긍이 갈 수 있는 설명이다.

밀양과 광주

‘밀양’은 1985년에 발표된 이청준의 중편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소설에서는 아들을 잃은 엄마가 유괴범이 사형된 지 이틀 만에 자살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밀양’과 ‘벌레이야기’의 상황설정도 같고 다루려는 문제의식도 비슷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다르다. 신애는 자살하지 않고 밀양의 비밀스런 볕 안에서 구원을 얻는 듯했다. 이 청준은 ‘밀양’ 시사회를 보고나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는 벌레이야기와 약간 다른 구조를 가지지만 여자가 겪는 고통의 색깔이나 구원과 용서의 굴곡을 겪는 과정은 똑같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영화 속에 원작의 의도가 충실히 살아있다는 뜻이겠다(조선일보 2007년 5월 29일).

이청준은 ‘벌레이야기’에 광주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역사가 담겨 있다고 했다. 정작 죄를 지은 사람들은 세월과 함께 형을 치러 사회적인 용서를 받았지만 광주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야 하는 현실을 인식했고, 소설을 통해 죄와 용서라는 문제를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도구로 쓰인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구원 논리였다. 따라서 영화를 보면서 개신교 신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과대 포장해 국민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식의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진 셈이다. 전도연이 수상소식 때문인지, 혹은 이런 나라 전체의 영광스런(?) 시점에 괜스레 나섰다가 바가지로 욕을 먹을까 두려워해서인지 아무튼 기독교계의 목소리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문제를 삼자면 충분히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상황 설정이 영화에 포함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소설이나 희곡이나 영화에서 비극을 더욱 큰 비극으로 만들면서 끝을 내는 경우를 종종 본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가 만일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기억되지 못했을 테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비극이기에 불후의 명작들로 꼽히게 되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라 완벽한 헤피 엔딩이 아니라 무엇인가 가슴 찡한 여운을 남겨야 관객의 시선을 끌 수 있다. 이창동 감독 역시 비극에 충실해, 막동은 총에 맞아 죽고(‘초록물고기’), 영호는 기차에 치어죽고(‘박하사탕’), 종두와 공주의 사랑은 시원한 결말을 보지 못한다(‘오아시스’). 그리고 세 영화 모두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 현실 세계의 음울한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회 문제를 다룬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인간 내면과 구원의 문제를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우선 이 영화의 가치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또한 이창동 감독이 비극은 더욱 큰 비극으로 끝맺어야 독자의 인상에 길이 남는다는 암묵적인 공식을 용감하게 깨트린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밀양’에서 종찬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 같다고 하고, 신애는 밀양의 ‘볕’ 안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숨어 있다고 한다. 감독이 신애의 편을 드는지 아니면 종찬의 편을 드는지 구체적으로 밝혀놓지 않았지만 더러운 땅을 환히 비추는 햇볕 안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분명하게 들어있었다. 만일 아름다운 초원에 햇볕이 머무르면서 영화가 끝이 났다면 감동은 훨씬 덜 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제목까지 다시 한 번 곱씹게 만든 감독의 솜씨가 뛰어나다.

전도연

전도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도연의 연기는 과연 대단했다. 그녀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는데, 먼저 밀양에 들어온 외지인으로서 현지사람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서울 사람 냄새를 좀 풍겨야 하는 세련된 여성이 있고, 갑작스런 아들의 유괴와 죽음 앞에서 충격과 설움을 표현해야 하는 젊은 어머니, 열성적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골수 기독교인, 유괴범을 만나고 난 후에 찾아온 갈등을 무모하게 드러내는 반쯤 정신이 나간 여인 그리고 모든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인간 이 시내까지……..

한 사람의 배우가, 한 영화에서, 그 모든 감정을 소화해 내기란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집에 들어와 아들을 데리고 있다는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평온한 상태에서 한순간에 무너지는 감정연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일 분도 안 되는 동안 급작스레 일어나는 극적인 감정변화를 표현하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무려 2시간 반이나 되는 상영시간을 견디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오로지 전도연의 연기 때문이었다. 칸느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충분히 탈만했다.    

전도연의 연기를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쯤 방영된 TV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였다. 이는 배용준이 주목을 받은 드라마였기도 하다. 그 때 하희라의 동생 역을 했는데 언니에 대한 애증을 동시에 담아내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최고의 미인이라든가, 최고의 몸매라든가 하는 수식어는 전도연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최고의 여자 연기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전도연에게 처음 시내 역을 제안했을 때 그녀는 무척 망설였다고 한다. 그렇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낼 자신이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는데, 그녀가 작품의 인물 됨됨이를 사전에 정확히 파악했다는 증거이다.

송강호는 쉽게 눈에 안 띄는 역을 잘 소화해 내 전도연의 연기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주연과 조연에 모두 능한 훌륭한 배우이다.

우리의 죄, 우리의 구원

이 글의 처음에서 ‘밀양’을 보고난 첫 느낌이 그저 밋밋했고 무엇인가 뿌연 기운만 감돌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차분히 앉아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더니, 훌륭한 한국 영화 한 편이 나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밀양’은 분명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그저 암시만 하는 상태에서 끝을 맺고 나머지 해석은 관객이 집으로 가져가 요리조리 꿰어 맞춰보라는 영화이다. 인간이 죄와 구원이라는 문제를 갖고 고민한 것은 아마 수 천 년에 이를 것이다. 물론 그 고민을 감독이 한 순간에 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애는 유괴범의 딸이 거리에서 제 또래의 불량한 남자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것을 외면했고 미장원에서 그 딸을 다시 만났을 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잘 알지만 정작 그 일을 해내기에는 너무 약한 존재이다. 그저 햇볕 속에 무엇인가 비밀스런 섭리가 있으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초기 그기스도교의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비단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생각해볼 구절이기에 옮겨본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로마서 11장 3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