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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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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저지른 만행. 아마 영화에서 이처럼 많이 다루어진 소재는 없을 것이다. 전후에는 ‘지상최대의 작전1962’처럼 전쟁 그 자체를 다룬 영화들이 많았지만 70년대 이후론 급격히 줄어들었고 ‘하노버 스트리트1979’처럼 전쟁 중에 꽃피었던 사랑 이야기도 흔했으나 이젠 시들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 주제, 곧 전쟁이 가져온 인간성 파괴는 여전히 우리의 감성을 날카롭게 자극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 역사에 치유될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겨주었다. ‘더 리더’(스티븐 달드리 감독, 극영화, 미국/독일, 2008년, 123분) 역시 전쟁이 남긴 잔인한 흔적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었을 법한 50년대 독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음울해 보인다. 길에서 갑자기 구토를 하던 마이클(데이빗 크로스)은 우연히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도움을 받는다. 감사의 말을 전하려 한나의 집에 방문한 마이클은 한나와 사랑에 빠지고 하루가 멀다않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러다가 마이클은 한나가 책 읽어주는 것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점을 알아내고, 애인이자 ‘책읽어주는 남자’로 그녀의 곁에 머무른다. 아직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어느 날 한나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렸고 마이클에게 그녀는 철없던 시절의 사랑쯤으로 추억을 장식한다.

후에 법과대학생이 된 마이클은 지도교수 롤(부르노 간쯔: ‘베를린 천사의 시’)과 재판에 참관하러 갔다가 유대인 학살 죄목의 전범으로 피고석에 앉아 있는 한나를 발견한다. 불장난 사랑이 급작스레 차디찬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감독은 ‘더 리더’를 통해 이제까지 만들어졌던 유대인 희생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측면을 보여주려 한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선의의 피해자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한나는 착하고 성실한 여성이다.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이리저리 직업을 찾다가 겨우 간수로 취직했고 2차 대전 중에 유대인 죄수들을 호송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혼란을 막기 위해 죄수들이 갇힌 교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피고석에 앉아있던 다른 여 간수들과는 달리 자신이 한 일을 그대로 인정하는 솔직함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글까지 못 읽었으니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리석을 만큼 착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지독하리만치 성실하고 어떤 경우라도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 10년 가까이 독일에서 살았던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한나는 전형적인 독일인이다. 한나가 재판정에서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는 차치해 두더라도, 그녀를 잔인한 역사의 희생자로 간주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변호사가 된 마이클(랄프 파인즈)은 수감된 한나와 접촉을 갖기 시작했고 석방 후에 그녀를 돌봐주려는 맘까지 품는다. ‘죄는 미워하지만 인간은 미워해서 안 된다’는 인도주의적 사랑이 막 움트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은 전쟁에 직접 책임이 없는 전후 세대 독일인 마이클이 아니라, 소녀시절에 한나에게 수시로 불려가 책을 읽어주었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재판정에 나와 한나를 고발했던 일라나 마터와 그의 딸 로즈 마터에게 있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마터 모녀에겐 한나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케이트 윈슬렛(‘타이타닉’)의 연기도 뛰어났지만 필자에겐 오히려 마터 모녀의 일인이역을 맡아 품위 있는 연기를 보여준 레나 올린(‘아홉번째 날’)이 인상적이었다. 두 여배우에게서 명배우의 숨길이 가감 없이 느껴졌다. ‘더 리더’는 비록 30대 여인과 어린 소년의 성관계를 거리낌 없이 표현해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값싼 호기심일 뿐이고, 뚜렷한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진지한 영화였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