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박쥐

[영화평]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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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쥐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엇갈린 반응

최근에 어느 대학 학보사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원고청탁 건이었는데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극영화, 한국, 2008년, 133분)를 평해달라는 것이었다. 많고 많은 영화평론가 중에 하필이면 왜 나인가 하고 물었더니 신부이면서 영화평론가는 대한민국에 딱 한 사람밖에 없다나! 그 한마디에 으쓱해 부랴부랴 영화관을 찾아 들어갔다 나오며 처음 떠오른 질문은 ‘감독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지?’였다. ‘박쥐’에는 종교, 애정, 엽기, 공포, 범죄 등등 다양한 코드들이 들어 있는데 하도 뒤섞여 있어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상영시간을 왜 그렇게 길기만 한지!
박찬욱 감독은 명실 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적인 감독이다. ‘올드 보이’2003와 ‘친절한 금자씨’2005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아 그가 추구하는 폭력미학이 날개를 단 까닭이었다.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작품인 ‘박쥐’가 개봉되자 예상했던 대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때마침 열린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출품되어 심사위원상까지 받으면서 언론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아니, 일부러 칸 영화제를 겨냥해서 ‘박쥐’를 제작, 개봉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르겠다.
사실 어떤 영화든지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모든 관객과 평론가의 시선이 일치하는 일은 절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쥐’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리만치 양분돼 있어 어떤 식으로든 교통정리를 해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아마 필자가 유난히 어지러운 것을 못 참아 넘기는 성격이라 그런 모양이다.

흡혈귀 신부

수도회 신부인 상현(송강호)은 평소부터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범적 사제이다. 불행한 이웃을 위해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서있는 상현은 난치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에 참여해 기꺼이 생체 실험대상이 되었으나 수혈 과정에서 운 없게 흡혈귀의 피를 받는다.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흡혈귀가 된 상현은 피를 즐긴다. 그래서 종부終傅성사(죽은 이를 위한 성사) 때 손에 묻은 피를 슬쩍 맛보더니 수혈용 혈액을 훔쳐 냉장고에 보관해두었다가 마시고 의식불명 상태 환자의 피를 수액세트를 통해 빨아댄다. 그것도 바닥에 편안하게 누워 ‘쪽쪽’ 소리를 내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상현이 봉사하는 병원이 안전한 혈액 공급처가 된 셈이다.
흡혈귀로 거듭나고 보니 초능력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창문에 거꾸로 매달리고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 차 트렁크 문짝도 가볍게 뜯어 바다로 날려 보낸다. 괴력을 과시해 달라는 태주(김옥빈)의 부탁에 상현은 500원 동전을 손가락 힘으로 간단히 찢어버린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네 남편도 이렇게 찢어줄까?”
흡혈귀로 살다보니 유난히 성적 욕구가 강해진다. 그래서 상현은 친구 강우(신하균)의 아내 태주를 수시로 탐해 방해꺼리 친구를 제거하고, 심지어 자신을 신처럼 받드는 여신도를 한밤중에 찾아가 겁탈한다. 공교롭게도 여신도는 장애인이었다. 그 장면에서 상현의 성기가 거리낌 없이 노출되어 관객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흡혈귀로 변하니 하느님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무뎌진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으면서 상현은 신앙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지만 여전히 수도복과 제의와 사제복을 걸치고 다닌다. 스스로 더 이상 신부가 아니라고 하지만 남들에게 비친 모습은 여전히 변함없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상현은 간간히 태주가 던지는 말에서 위로를 받는다. “나는 원래 종교가 없으니 지옥도 내겐 없는 거예요.”

박찬욱 스타일

이제까지 수많은 흡혈귀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자체적인 변화를 거듭해왔다. 저 옛날 ‘노스페라투’1922를 흡혈귀 영화의 기원으로 잡으면 90년 가까이 흡혈귀 영화가 재생산된 셈이다. 흡혈귀는 일반적으로 마늘을 싫어하고, 태양빛을 직접 쬐면 타죽고, 낮엔 관에 들어가 잠을 자고, 십자가 앞에선 맥을 못 춘다. 거기에 하나의 도식이 더해져 신부가 흡혈귀와 대결하여 결국 악의 대명사인 흡혈귀를 퇴치하는 이야기구조가 탄생했다.
흡혈귀는 악의 세력을 대표하며 이 세상에서 사라져 마땅한 존재이다. 그/그녀에겐 어떤 자비심도 베풀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나 ‘반 헬싱’2004같은 활극이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흡혈귀 영화가 진화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슬슬 흡혈귀 입장에서 작품이 만들어지더니(‘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드라큐라’1992) 요즘은 아예 흡혈귀를 감싸 안는 듯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트와일라잇’2008, ‘렛미인’2008). 신부가 흡혈귀로 변하는 ‘박쥐’는, 말하자면 최신 감각의 흡혈귀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오래된 두 원수를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하나로 만들어버렸으니 말이다.
박찬욱 감독의 장기는 어떤 주제를 선택하더라도 저 깊은 곳까지 그 주제를 들여다보려는 장인기질에 있다. 그곳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끝까지 가보겠다는 작가 정신이다. 예를 들어,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는 이우진(유지태)의 은밀한 개인 집무실에까지 파고들어가 사태의 진실을 발견하곤 자신의 혀를 잘라낸다. 또한 그곳 가장 깊은 공간에서 이우진의 놀랄 정도로 잘빠진 몸매가 관객에게 공개된다. 그리고 이우진의 자살.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는 공공의 적인 백 선생(최민식)을 완벽하게 살해한다. 얼마나 완벽한지 경찰 뿐 아니라 관객마저도 그 살인에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흰 눈이 오는 날 금자 앞에 배달된 두부 케이크. 복수의 끝에 흰색 환희가 서 있다.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박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흡혈귀는 최대의 적인 신부마저 정복해 버린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흡혈 가능성을 하나씩 자세하게 보여준다. 어떤 흡혈귀 영화에서도 이런 식의 다양한 흡혈을 구현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감독의 머리엔 아직 못 다한 흡혈 장면이 남아있을 지 모른다. 아무튼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다!
칸 영화제는 흔히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영화제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파악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어떤 장르이든 상관없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변화의 폭에 도전하는 작품에게 호의를 베푼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혀 상반된 이미지의 ‘펄프 픽션1994’과 ‘아들이 방2001’이 어떻게 그랑프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박쥐’는 그런 점에서 아마 칸의 심사위원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이 다시 한 번 개가를 올린 영화로 보아 마땅하다.

영화의 숨은 뜻

박찬욱 감독의 작가정신이 돋보인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박쥐’는 매우 불편했다.
감독은 신부가 흡혈귀로 변하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될 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다. 상황을 설정하는 도입부가 지나자 곧바로 상현의 변태적인 행태가 곳곳에서 화면을 장식한다. 상현은 시신의 피를 핥아먹고 식물상태 환자의 피를 빨아먹고 영적지도 신부의 가슴에서 분출되는 피를 마시고 결국 여러 명을 몰아넣고 흡혈 파티를 벌인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서 충격적인 흡혈 장면이 진저리 칠 정도로 반복되어 그 때마다 눈을 감곤 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곳곳에 섬뜩한 유머가 배치되어 있어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다. 도저히 웃을 수 없는 긴장 상황에서 관객들에게 여유를 제공하는 ‘블랙 유머’ 말이다. ‘박쥐’에도 그런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엽기적인 설정이 너무 강해서인지 제대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반대로 마치 흡혈귀 영화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계에 도전하는 감독에게 실험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혼자서 극장에 왔다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마침 가장 가까운 친구 신부님과 나란히 앉아있다 보니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 명색이 평론 하는 사람이니만치 평소부터 어떤 영화라도 소화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박쥐’는 예외라, 마치 신경을 날카로운 칼로 긁어내는 듯했다. 그렇다면 혹시 감독이 이렇게 불편한 느낌을 관객에게 강요하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악의 대명사인 흡혈귀를 퇴치해 마땅한 신부가 오히려 흡혈귀로 변하고 말았다. 사실 수혈 받는 피를 선택할 권리가 환자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 흡혈귀 피라는 게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흡혈귀가 되어 험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상현이 종종 이런 불행한 상황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이유가 거기서 발견된다. “여우가 닭을 잡아먹는 게 어떻게 죄란 말인가?” 하지만 그 정도 변명으로 마디마디 상처 난 필자의 신경이 치유될 순 없었다. 영화가 흡혈귀로 변한 신부 이야기를 다루지만, 실은 흡혈귀와 무관하게 신부 자체에게 이미 그런 성향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듯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마치자 갑자기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쥐에 담긴 암시들

신부는 매일 미사 때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정작 입으로는 ‘이는 너희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다.’라는 미사예문을 읊조린다. 그렇다면 영화에선 구태여 흡혈귀로 변하지 않더라도 신부란 사람은 벌써부터 피를 마시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 교회는 예수의 기적을 역사적인 사실로 선포한다. 다시 말해, 예수가 실제로 물 위를 걸었고 두 마리 물고기와 다섯 개의 보리빵으로 5천명을 먹였으며 귀신을 내쫓았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상현은 500원 동전을 두 조각 낸 후 태주에게 신기한 능력이라며 과시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싸구려 차력 정도를 종교적 기적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뜻인가?
흡혈귀가 되고 나니 갑자기 귀가 밝아져 상현은 저녁기도 후 각자 방으로 흩어진 수도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랬더니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자위행위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구태여 흡혈귀가 아니라도 신부는 이미 참을 수 없는 성적 욕구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 가능해진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상현이 태주와 맺었던 불륜은 구태여 흡혈귀가 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현이 어떻게 사제의 일상복인 수단을 걸친 채 태주와 관계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이제 태주의 말을 다시 꺼내들어 보겠다. “나는 원래 종교가 없으니 지옥도 내겐 없는 거예요.” 정결 서약을 한 신부이면서도 욕정에 사로잡혀 친구의 아내를 탐한 상현의 죄의식 앞에서 태주가 한 충고이다. 달리 풀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내용이다. 영화에는 그 비슷한 사람이 한 명 더 나온다. 오랜 수도생활을 해온 노老신부(박인환)는 백내장 때문에 거의 장님 신세가 된 인물이다. 그는 예전에 보았던 천연색 세계를 그리워한 나머지 상현에게 피 좀 나누어 달라고 애원한다. 노신부가 복도까지 기어 나오며 한 방울의 흡혈귀 피를 구걸할 때, 평생 지켜왔을 법한 그의 신앙은 싸구려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십자가엔 예수가 붕대로 싸여 있다. 거기엔 고통 받는 인간 예수는 있을지언정 십자가의 원래 의미, 곧 세상의 구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숭고한 희생은 자리 잡을 곳이 없었다. 교회에 대한 도발은 영화의 처음부터 그렇게 등장한다.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거침없이 살인을 일삼는 흡혈귀 태주를 막기 위해 상현은 동반자살하기로 결심한다. 감독은 상현의 결심을 순교자적인 결단으로 묘사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햇볕에 타 죽고 신발 두 켤레만 덩그러니 남아 땅에 ‘툭’ 떨어진 순간,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구원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영화

요즘 영화들을 보면 곧잘 성직자와 교회의 권위를 건드린다. 그 중에는 교회의 가르침을 직접 표적으로 삼은 영화도 있고 은근슬쩍 교회의 치부를 들춰내는 영화도 있다. 역사의 예수가 결혼을 했고 그 후손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다빈치 코드’2006가 적절한 앞의 예가 될 것이고 신앙 좋아 보이는 장로님도 욕정 앞에선 맥을 못 추고 말더라는 ‘밀양’2006이 좋은 뒤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런 영화들의 단골 소재가 바로 가톨릭 신부이다. 가톨릭 신부는 서품 과정에서 서약을 하는데 수도 사제인 경우 청빈과 독신과 순명 서약을 하고 재속 사제인 경우 독신과 순명 서약을 한다. 사실 인간의 자연미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가톨릭 사제란 부자연스런 존재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저런 영화들을 통해 ‘신부 역시 우리와 똑 같이 결점 많은 사람이다.’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기억해 보면, ‘엑소시스트’1973의 데미안 칼라스 신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최근에 개봉된 ‘천사와 악마’2009의 패트릭 매키나 신부는 빗나간 신념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 현대 사회의 특징 중 한 가지다. 부모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고 스승의 권위가 교육현장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나이가 들어도 전혀 어르신 대우를 받지 못한다. 물론 이는 어른들의 시각일 뿐이고 젊은이의 주장을 들어보면 제법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 보인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건강한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자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과거식 질서의 재편성이라는 것이다.
‘박쥐’는 2천 년 간 튼튼하게 유지해왔던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를 우스개 감으로 삼고 그리스도교의 구원 논리에 도전장을 던지는 영화다. 결코 가톨릭교회의 독신 사제에게 어느 날 우연히 생긴 일만으로 치부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한 짙은 부정이 담겨있다. 필자가 영화를 보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숨이 턱하고 가로막히는 느낌이었다.

가치 있는 삶

감독은 가톨릭 신부의 제복 뒤에 숨어있을 법한 살 냄새 나는 인간을 보여주려 한다. 물론 그의 관찰이 전혀 틀렸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비록 거룩해 보이는 신부라 할지라도 한계를 가진 가녀린 인간에 불과하며 종종 십자가를 방패삼아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가치 있는 삶은 결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욕구를 누르는 강한 의지와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하는 절실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대단히 연약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종종 한계를 거부한다. 그처럼 불굴의 의지로 한계에 도전하는 정신만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 수 있다. 상현은 흡혈귀가 되면서 인간다운 삶을 너무나 쉽게 포기했고 감독은 오히려 거기에 진실이 들어있다고 강변한다. 5% 약점으로 나머지 95%의 강점을 농락한 셈이다. 선후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의 머리에서 흡혈귀 신부의 피 묻은 얼굴에 김수한 추기경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오버랩 될 수 있었겠는가?
‘복수 삼부작’에서 박찬욱 감독이 보여주었던 폭력미학의 세계는 실로 대단했다. 세 작품의 장면 하나 하나가 상세하게 기억날 정도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독의 역량에 사뭇 버거운 주제를 다룬 듯하다.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 보다는 생략을 통해 관객이 자유롭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주는 게 좋을 뻔했다. 90분이면 충분한 내용을 133분으로 늘리면 자연 관객의 몫이 그만큼 빼앗기기 마련다. 과욕을 부린 탓이다.
감독은 칸 영화제 수상과 극과 극의 반응이 나오고 있는 맹랑한 현실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