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2012

[영화평]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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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서부해안부터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북미 대륙,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화산 폭발, 수천 킬로를 이동한 아시아 대륙, 위치가 바뀐 남극과 북극, 지구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을 덮치는 쓰나미…….. 과연 이런 재난을 상상하거나 본적이 있는가? 영화 ‘2012’(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재난영화, 미국/캐나다, 2009년, 157분)에 나오는 재난의 규모는 입을 다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과연 더 이상의 재난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012년 12월 21일. 종말 사건이 일어나기로 예고된 날짜다. 혹시, 독자 중에 금시초문이신 분이 있으면 얼른 인터넷에서 이 숫자를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틀림없이 마야의 달력엔 2012년까지밖에 기록되어있지 않다, 거대한 혜성이 그 날 지구와 충돌한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일렬로 선다, 미국엔 이미 자신들만 살아남으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등등의 정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1992년 10월 28일 종말이 온다고 떠벌렸던 다미선교회의 종말론과 비슷하다. 이런 예측을 두고 흔히 ‘시한부 종말론’이라 하는데, ‘2012’는 바로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재난영화다.

‘2012’는 현대 영화 기술의 총아로 꼽히는 컴퓨터 그래픽(CG)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그 이전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들을 만들어냈는데, 에베레스트에 실제로 물이 넘치는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제작비(2억달러)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웅장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는 단지 제작비만 문제되지 않는다. 있는 대로 자금을 퍼붓고 실패한 영화가 부지기수라서 하는 말이다. ‘2012’에 들어있는 감독의 철학은 간단하다. 지구 종말을 가능한 한 그럴듯하게 묘사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섬뜩했던 부분이 있었다.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 무너지던 장면에서였다. 르네상스 풍으로 지은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이 베르니니가 만든 원형 광장으로 무너져 내리기 직전, 시스틴 경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그 균열은 이리저리 그림을 갈라놓다가 마침내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듯 연결된 사이를 정확히 지나간다. 종말이란 신이 더 이상 인간을 돌보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사건이다. 의미심장했다.

서양 세계는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여기는, 이른바 직선적 역사관을 갖고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코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역사관이 있어야 온 육지가 바다에 잠기고 에베레스트 근방에 세워진 방주로 도피한 이들만 살아남는 경우가 성립될 수 있다. 현대판 노아의 홍수인 셈이다. 선대가 물려준 땅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다시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반복되는 원형적 역사관에 익숙한 동양 세계에는 어딘가 어색한 역사관이다. 아니, 이제까지 비교적 자연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낯선 게 당연하다.

영화에서 또 하나 눈에 띄었던 곳은 히말라야 산을 넘어오는 쓰나미를 바라보면 어느 라마승이 초연하게 종을 울리는 장면이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서 ‘종말이 온들 그게 뭐 대수인가?’라는 동양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종말은 어차피 인간이 조절할 수 없는 범위이다. 그러니 나는 이 순간 최고의 삶을 살리라. 오늘 하루 가장 아름답게 사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종말을 걱정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오늘을 잡으시오!’ Carpe 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