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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러디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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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러디 선데이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자기 민족의 고유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나라,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직이 불가능한 나라, 어떤 이에게는 투표용지 한 장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여섯 장이나 주는 나라. 그런 나라에 살아본 적이 있는가? 바로 온 몸을 바쳐 평등을 쟁취하려는 북아일랜드의 이야기다.  
얼마 전에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폴 그린그라스 감독, 고발영화, 영국/아일랜드, 2002년, 110분)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1972년 1월 31일, 일요일 하루 동안 북아일랜드 런던데리 시에서 일어난 시민 행진과 폭동과 무차별 진압을 사실감 넘치게 다룬 작품이다. ‘블러디 선데이’는 지난 2002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세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영화제 최고상인 ‘금곰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선댄스 영화제에서는 관객들이 뽑은 최고상을 차지했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두 영화제가 갖는 중량감을 고려할 때 영화의 객관적인 품질이 보장된 셈이다.
‘블러디 선데이’라는 어휘에는 묘한 복선이 깔려있다. 우선 파업노동자들에게 발포하여 온 러시아를 피로 물들인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과 영국 여왕이었던 메리 1세(1553-58년 재위)가 수많은 개신교인을 죽여 얻은 별명인 ‘블러디 메리’가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선혈이 낭자하다.
아일랜드는 고난의 땅이다. 19세기 중반에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기근이 닥쳐와 인구의 1/4이나 죽었고 산 자들 중 상당수가 유민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한 아일랜드는 치욕의 땅이다. 17세기에 발단된 영국과의 영토분쟁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그곳은 걸출한 인물의 땅이기도 하다.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조지 B. 쇼, J. 조이스 등 세계적인 문인을 배출한 땅이니 말이다.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아일랜드와 관련된 그 모든 이야기를 떠올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일랜드’라는 어휘 하나에 수많은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피 끓는 두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비록 우리는 아일랜드인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니라 전적인 감정이입은 불가능하지만, 영화에 압축되어 있는 여러 정보를 차근차근 풀어보면 그 정서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다.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IRA와 테러리즘

영화 초반이 조금 지나 군중이 모여들어 행진을 시작할 즈음, 주인공인 아이반 쿠퍼 하원위원(데리시 공민권협의회 대표)이 승용차에 탄 건장한 사내들에게 자제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 영화 중간 중간에 진압 군인들을 총으로 저격하려는 사내를 시위대가 에워싸 저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복수심에 불타는 사내들이 바로 IRA 소속 테러리스트들이다.
IRA, 곧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는 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와 더불어 1970-80년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테러 집단이었다. 그들은 건물폭파, 요인암살은 물론 거리점거까지 강행했다. 필자의 독일 유학 시절,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거머쥔 손을 그린 포스터가 거리 벽에 나붙은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수세기 동안 영국의 식민지 노릇을 하던 아일랜드는 1920년에 아일랜드 통치법으로 영국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아일랜드는 1921년에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거처 1922년에 자유국가로 태어나 나라다. 하지만 북아일랜드 6개 주는 여전히 불씨로 남았다. 아일랜드에 편입될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한 개신교 신자들(비밀결사 오렌지 당)이 영국의 계속적인 지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북 아일랜드는 영국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Nationalist)과 영국령으로 계속 남아있으려는 충성주의자들(Loyalist)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1919년에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결성되었던 IRA는 아일랜드 완전 독립을 주장하면서 북아일랜드 해방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들은 북아일랜드는 물론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도 수많은 테러를 저질렀고, 무장 투쟁을 멈추기로 한 94년까지 3천 2백여 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1972년 1월 31일에 벌어진 영국의 무차별 진압은 바로 IRA가 극렬한 테러로 전략을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많은 젊은이들이 IRA에 가입하기 위해 줄은 서는 장면이 나온다.
테러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출근길에 부르터스 일당에게 살해된 케사르가 있고, 이등박문을 살해했던 안중근도 일본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한 한 때 남미의 독재자들을 온통 공포에 몰아넣었던 ‘도시 게릴라’(Urban Guerrilla)도 전형적인 테러리스트들이며, 얼마 전에 이라크에서 억울하게 숨을 거둔 김선일 씨도 테러에 희생된 경우이다. 테러는 정규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정치적인 신념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오늘날 북 아일랜드 자치정부의 집권당인 ‘신 페인’(Sinn Féin) 당은 IRA의 정치 기구이다. 영화에서도 ‘신 페인’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공민권 획득을 위한 행진을 계획했던 쿠퍼는, 살육의 날이 지나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말한다. “오늘 이후로 북 아일랜드의 많은 젊은이들이 IRA에 가입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은 곧 끔찍한 피의 보복이 뒤따르리라는 예언이었다. 쿠퍼의 꿈은 평화의 땅이지 결코 폭력의 땅은 아니었다. 평화행진을 하던 시위대가 부르는 ‘우리 이겨내리.’(We shall overcome)의 분위기 대로이다. 이 노래는 원래 미국의 반전가수 존 바에즈가 불렀던 대표적인 운동가요이다.
IRA와 관련된 영화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년)와 ‘데블스 오운’(1997년)이 있다. 브레드 피트를 앞세워 그럴 듯하게 포장한 ‘데블스 오운’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훨씬 잘 만들어진 영화다. 

종교 갈등과 공민권

‘블러디 선데이’에서 평화행진을 주도했던 이들이 앞에 내건 이슈가 바로 ‘공민권’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를 ‘시민권’으로 번역했는데, 큰 잘못이다. 시민권은 글자그대로 시민 자격을 뜻하고, 공민권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공민公民으로서의 권리를 뜻한다. 영화에 나오는 Civil Rights는 공민권이 맞는 번역이다.  
12세기부터 아일랜드는 영국의 간섭을 받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전쟁과 반란이 잇따랐고 거기에 기근까지 겹쳐 나라가 온통 황무지로 변했다. 1652년에 아일랜드는 영국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었고, 호국경(Lord Protector) 크롬웰은 몰수한 땅을 영국에서 넘어온 개신교인들에게 분배했다. 이른바 크롬웰의 이주정책인데, 아일랜드인은 이를 두고 ‘크롬웰의 저주’(Curse of Cromwell)라 부른다. 타지에서 온 자들이 아일랜드인의 주인 행세를 하게 만든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헨리 8세(1491-1547) 이후 교황이 수장인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왕을 수장으로 하는 국교회(성공회)가 탄생했다. 그렇게 된 데는 헨리 8세의 결혼문제가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근저에는 보다 광범위한 이유가 있다. 16세기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시기였고, 개혁의 중심에는 르네상스의 정신이기도 한 인문주의(Humanism)가 들어있다. 영국의 개신교인 성공회도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 봄이 무방하다.
아일랜드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영국은 17세기 말 이후로 새로운 법조항을 끊임없이 발표했다. 주된 내용을 보면 아일랜드인의 재산 소유를 금했고, 아일랜드 고유 언어(게일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을 요구했다. 철저한 가톨릭신자였던 아일랜드인들은 악법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그 법 조항이 아일랜드인의 민족정신을 깨우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끈임 없는 독립요구와 투쟁, 봉기가 잇따랐는데 그때마다 영국은 새로운 법과 진압경찰을 통해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의 굽히지 않은 투쟁의 결과, 1829년에 가톨릭 해방법과 20세기 초에 아일랜드 토지법을 통과시켰고, 드디어 1920년에 아일랜드 통치법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분리된다.
1920년의 통치법이 제정될 때 북아일랜드는 독립을 거부했다. 명실 공히 가톨릭 국가가 될 게 뻔한 아일랜드에서 자신들의 지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한 개신교인들의 강력한 입장이 먹혀든 탓이었다. 북아일랜드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개신교인들은 전 인구의 1/3인 가톨릭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래서 불평등 선거권(개신교인 6표/가톨릭신자 1표)에 이어 고용 차별 및 공영 주택의 입주권마저 제한했다. 따라서 공민권 획득은 곧 북아일랜드 가톨릭신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주인공인 쿠퍼는 자신이 ‘관면寬免을 받았다.’고 여러 사람에게 자랑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인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까지는 허락하지만 성체를 못 모시게 한다. 쿠퍼는 비록 개신교인이지만 가톨릭 주교로부터 영성체領聖體를 하도록 관면 받은 사람이다. 그는 가톨릭신자들의 공민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었으니 만치 관면이 필요했을 법하다. 유럽 종교의 상황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과 이후가 판이하다. 같은 예수님을 섬기면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놓인 적대감이 엄청난 까닭이다. 특히, 양쪽이 벌였던 30년 전쟁(1618-1648년)이 유명한데, 북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양쪽의 격전지이다.    
영화에 나오는 여러 용어들과 상황은 북아일랜드의 종교적인 상황과 철저히 맞물려있다. 영화 관람에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주고 성호를 긋는 신부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대표적인 스틸 컷이 바로 총상 입은 사람을 보호하며 뛰어가는 신부의 모습인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가톨릭의 7성사 중의 하나인 ‘고백성사’가 아일랜드에서 11세기에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쿠퍼의 선배로서 아일랜드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역사적인 인물로는 D. 오코넬과 M. 콜린스가 있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마이클 콜린스’(1996)인데, ‘블러디 선데이’ 감상에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 치욕과 명예의 역사  

서구에서 ‘아일랜드사람’이라고 하면 그 말자체로서 독특한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인가 고집 세고, 다혈질이고,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그런 면모는 존 웨인과 모린 오하라가 주연한 ‘아일랜드의 연풍’(The Queit Man, 1952)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아일랜드 기질의 진면목은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갱스 오브 뉴욕’(2002)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갱스 오브 뉴욕’에 보면 19세기 중반에 물밀 듯 미국으로 들어오는 아일랜드 유민들이 어떻게 미국에 정착해나갔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을까?
1845-46년에 감자마름병이라는 신종 식물 전염병이 아일랜드를 휩쓸었다.  감자마름병은 바람을 타고 일주일에 80km라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모든 감자들이 썩어문드러져 그해의 수확은 최악이었다. 1948-51년에 감자마름병이 다시 한번 창궐했고 아일랜드는 1846년에서 51년까지 역사상 유래 없는 대기근을 맞는다. 무려 240만 명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아일랜드 전 인구의 1/4이나 되는 숫자였다.
살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은 대거 미국으로 건너갔고(전 인구의 1/5) 미국에서도 최하의 빈민층을 구성한다. 그렇게 된 데는 개신교 앵글로 색슨이 주류를 이루었던 미국사회에서 가톨릭 아일랜드 유민이 설 자리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다. 역시 종교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아일랜드인은 미국에서 천민취급을 받았다. 본국에서 영국인들에게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미국에서도 재현된 셈이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보여주는 상황 그대로이다.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의 강인한 공동체 의식은 그들의 운명을 바꾸었다. 발군의 능력과 끈기를 발휘한 아일랜드 유민의 노력으로 아일랜드계 주교들이 미국 가톨릭을 이끌게 되었고, 20세기 초부터는 미국의 상류층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마침내 1961년에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인 존 F. 케네디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에서 인고의 세월이 끝났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미국에서는 싸움이 끝났지만 북아일랜드의 상황은 요지부동이었다. 1인 1표 제도를 확립시키려는 가톨릭 신자들을 주축으로 북아일랜드 공민권 협회가 1967년에 결성되었고, 개혁을 저지하려는 개신교 과격파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특히 수도 벨파스트는 하루건너 충돌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개신교 신자들의 편을 들어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한 영국은 과격시위가 줄을 잇자 본국에서 공수부대를 파견했고 드디어 1972년 1월 31일에 런던데리에서 살육의 날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수부대원들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희생당한 전우들의 복수를 하자는 심산이었다. 그처럼 과잉진압은 이미 예고된 바였다. 시민들을 향한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사격과 증거 조작……. 엉뚱하게도 그들은 영국여왕에게서 훈장까지 받았다. 그 정도 내용만 보아도 ‘블러디 선데이’가 아일랜드인의 입장을 반영하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이 영화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점점 과격해지고 장기화되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줄을 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98년에 영국,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신구교도들이 참석하여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 타결되었다. 이 평화협정은 미국과 국제사회가 산파역을 담당했는데, 아일랜드 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숫자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국제사회의 여론을 이끌어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멋진 고발영화

‘블러디 선데이’는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시간에 맞춰 꼼꼼하게 재연하는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시위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까지 영화에 등장하여 사건의 사실감이 드러나게 하였다. 특히 카메라를 촬영기사가 들고 뛰는 다큐멘타리 기법(이른바 핸드 핼드 기법)을 사용해 사실감을 한 차원 더 높여놓았다. 처음에는 어지러웠지만 세상 어떤 카메라보다 뛰어난 인간의 내장용 카메라가 어지러움을 곧 극복해냈다. 감독은 마치 수많은 자료화면들을 연출 감독이 재편집한 듯한 효과를 노렸고 그런 시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블러디 선데이’와 같은 고발영화는 일반 극영화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만들어진다. 마치 시위 현장에 직접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하고, 그 날 일어났던 어이없는 사태에 관객도 울분을 토할 수 있게 만들면 영화는 성공한 것이다. 런던데리에서는 불과 13명이 죽었지만 1980년 광주에서는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의 영화감독들도 언젠가 ‘블러디 선데이’ 수준의 고발 영화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는 36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너무 끔찍해 해방 후 세대도 괜히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다. 그런데 하물며 7백 년 동안이나 영국의 식민지로 살았던 아일랜드인들은 어떠할까? 요즘 젊은이들 말로 ‘안 들어도 오디오고,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는가?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극장에 들어서면 훨씬 큰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쿠퍼가 집을 나설 때 동네 극장 간판에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라는 영화제목이 걸려있다. 감독의 재치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블러디 선데이’는 보기 드물게 훌륭한 고발 영화이다.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아일랜드가 낳은 위대한 시인이며 19세기 말에 일어난 아일랜드 언어·문화 복권 운동의 지도자였던 윌리암. B. 예이츠(1865-1939)의 시 한수를 여기에 옮긴다.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Lake Isle of Innisfree)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 통 하나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에 혼자 살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누리네
평화는 천천히 방울져 떨어지니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으로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피어오르는 자홍빛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鋪道 위에 서 있을 때나
내 마음 깊숙이 그 소리 들리네

* 이니스프리는 게일어로 ‘히써 꽃의 섬’(heather Island)이라는 뜻. 히써는 자홍빛 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