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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새로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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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족

박태식신부(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과거에 발목이 꽉 잡힌 사람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하는 이런저런 충고가 이런 범주에 속한다. 딴에는 아들의 미래에 닥칠지 모른 불행을 사전에 막아보려는 바람에서겠지만 속내를 보면 자신의 어리석었던 지난날에 대한 뼈저린 후회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가 인간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극대화시킨 인물로는 아마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으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현재의 나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가한다는 식이다.
   
프로이드 비판에 앞장섰던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과거를 불변不變의 심리 장치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가변可變의 도구로 간주했다. 우리에게 장차 주어지게 될 미래가 오히려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과거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쓰라린 과거사가 실패자의 합리화 도구로 쓰이기도 하지만 종종 약진의 논리로 탈바꿈된다. 자신의 과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미래를 망칠 수도, 구할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과거는 우리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만든다. 숙명이다. 그리고 숙명적인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표적인 삶의 현장이 바로 ‘가족’이다. 어떤 이는 가족이 생활의 자양분이 된다면서 아들딸의 사진을 지갑에 소중히 넣어두지만, 어떤 이는 있는 가족마저 등지고 수도원을 선택한다. 그런데 가족을 떠나 들어간 수도원 역시 또 하나의 엄연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곤 수도자들은 다시 한 번 과거에 의해 목이 졸리는 경험을 한다. 가족이라는 과거가 모든 인간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는 까닭이다.
   
이제 살펴보려는 영화들은 기존 형태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족상을 그리고 있다. 하나같이 영화를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했던 게 아니다. 새로운 가족은 성이나 출신성분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때론 적극적으로, 때론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얄궂은 조건들에 노출된다. 누구도 어찌해볼 수 없는 얄궂은 조건들……, 세 영화의 공통점은 거기서 발견된다.  
        

자전거를 탄 소년
  
어린이는 그저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몸이 점점 자라 어른의 체형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를 진정한 어른이라 부르려면 필요조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독립적으로 일을 수행해나갈 수 있는가,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만일 가정까지 꾸리고 있다면 과연 그에 마땅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가 등등 각각이 처한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어른 됨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자전거를 탄 소년’(Le gamin au vélo, 다르덴 형제 감독, 극영화,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2011년, 87분)에서도 중요한 조건 한 가지를 제시한다.
  

시릴(토마 도레)은 절망적인 처지에 빠졌다. 엄마는 오래전에 어디론가 사라졌고 같이 살던 아빠마저 아들을 보육원에 맡긴 후 도통 나타나지 않는다. 아빠를 향한 그리움에 시릴은 보육원을 탈출하고 아빠가 이미 오래전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아빠는 시릴이 목숨처럼 아끼는 자전거까지 팔아치운 채 사라진 것이었다. 수소문하여 겨우겨우 찾아간 아빠에게서 돌아온 한마디는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말라’였다. 아빠를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릴은 스스로 얼굴을 할퀴고 차창에 머리를 찧는다. 세상에 홀로 남은 11살 소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영화는 그처럼 절망에서 시작하고, 관객은 자연스럽게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감독은 희망을 제시하는 데 서두르지 않는다. 얼마나 잔잔하게 영화를 이끌어나갔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 후에도 ‘이게 뭐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잠시 자리에 앉아 생각을 시작했고 그 후론 며칠 동안 영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우선 영화에 배경음악이 몇 번 나왔는지, 그리고 어느 장면에서 나왔는지 기억해냈고, 수돗물을 틀어놓고 계속 버티던 시릴의 마음 상태를 짐작해보았고,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와준 사만다를 칼로 공격한 장면이 떠올랐고, 시릴이 나무에서 떨어진 후 툴툴 털고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그 때쯤 되니까 영화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사만다는 자신과 시릴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남자친구의 요구에 시릴을 선택한다. 놀라운 결정이었다. 또한 영화가 결론으로 치닫던 무렵 시릴이 자신의 어린이용 자전거에서 사만다의 어른용 자전거로 바꿔 타는 장면이 나온다. 시릴의 삶에 큰 변화가 찾아온 순간을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릴의 매정한 아버지와 나무에서 시릴을 떨어뜨리게 만든 소년의 아버지도 대비를 이루었다.
   
‘자전거를 탄 소년’에는 감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관객을 과도한 웃음이나 억지 울음으로 유도하지도 않고 극적인 반전도 없으며 배경음악도 딱 네 번, 그것도 아주 간결하게 나온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에 나오는 짧은 주제다. 감독은 모든 절제된 감정을 다양한 상징과 은유에 섞어냈다. 돌이켜보면 한 장면 한 장면에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있었고 그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감독이 세세하게 지시했을 법한 상황이 머리에 그려졌다. 한마디로 다르덴 형제는 대단한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64회)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영화였다. 실로 오래간만에,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주는 영화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다르덴 형제는 ‘더 차일드(L’Enfan)’라는 성장영화로 이미 칸 영화제(61회)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 있는 감독이다. 혹시 그 영화를 본 적 있는 독자라면 ‘자전거를 탄 소년’을 선택하는 데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연출력의 승리!
            
  
남극의 쉐프
  
‘남극의 쉐프’(南極料理人, 오키다 슈이치 감독, 코미디, 일본, 2009년)는 한편으로 보면 코미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음식영화다. 슈이치 감독이 영화를 워낙 잘 만들어서 딱히 한쪽에 무게중심을 두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남극 기지에서 일 년 반 동안 살면서 대원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던 요리사의 에세이(<재미있는 남극요리인>)를 바탕으로 하기에 보는 재미가 더 있었다. 극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평균 영하 54도인 남극에 갖가지 자료를 수집하고 실험을 하는 기지가 세워졌다. 이곳에 사람이 살려면 네 과학자들 외에 최소한 네 명은 더 있어야 하는데 교통전문가, 통신담당, 의료담당, 음식 담당요원이 필수적이다. ‘거기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입니까?’ 일본의 어느 백화점에서 마련한 화상통화 행사에서 한 어린이가 물어본 질문이다. 8명은 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외로움!’
   
그들에겐 외로움이 가장 큰 적이기에 수없이 남아돌아가는 시간의 효율적 사용이 가장 중요하다. 매일 식사 후 조회 때 각각 자신이 그날에 할 일을 보고한다. 별 작업도 아닌데 며칠에 나누어 하고 괜한 일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탁구도 하고, 전화도 하고, 야외 야구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만화도 보고, 라면도 끓여먹고, 남몰래 샤워를 하면서 물을 낭비하고, 단체 체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은 아주 많이 남아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다들 하루 세끼 무엇을 먹을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우리들의 요리사 니시무라는 그 수많은 끼니(1년 6개월!)를 어떤 메뉴로 때울 지 고민한다.
   
영화를 보면서 일본식 유머를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일본 코미디 영화를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등장해 곧잘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한다. 사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극 지대 현실에서 엉뚱한 발상이라도 내놓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문명사회가 되면서 이제는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일본의 예전 명절 풍습을 재현해내고, 정월 초하루라며 모두들 정장을 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엘가의 ‘아침인사’를 들으며 프랑스 요리 ‘퓨레’를 즐긴다.
    
니시무라의 아내와 딸은 그가 남극에 간다니까 마치 장난처럼 그 일을 받아들인다. 니시무라는 보통 심각한 게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화상통화에 나선 딸은 자신과 엄마가 실은 얼마나 아빠를 그리워하는지 알려준다. 재미있는 점은 니시무라 쪽에선 전화 거는 상대가 딸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니시무라가 남극 기지에서 귀환한 후 영화 결말에 그 사실이 밝혀지면서 감동을 유발시킬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이 덮여진 채 영화가 끝나고 말았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더라도 애잔한 가족애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빤한 결론에서 벗어나려는 감독의 연출력이 가상했다.
   
혹 평소부터 남극기지 생활이 궁금했던 독자가 있으셨다면 꼭 영화를 보시기 바란다.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구태여 다 알려고 남극까지 갈 필요는 없다.         
  

가족의 탄생

  
‘영화의 작품성은 대중의 인기와 무관하다.’ 사실 필자는 그런 식의 영화 평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영화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대다수 관객의 호응이고 거기에다 재미까지 동반해 흥행에도 성공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혹은, 언제부터인가 철저히 관객의 입장을 고려하는 버릇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끔씩 예외도 있는 법! 바로 탁월한 작품성과 메시지를 담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외면을 당하는 경우다. ‘가족의 탄생’(김태용 감독, 한국, 극영화, 2006년, 113분)은 오랜만에 만나본, 참으로 맛깔스런 흥행에 실패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다섯 명의 여성이다. 평생 수동적인 삶을 살면서 남동생의 망나니짓을 남매의 정으로 수용하는 미라(문소리), 술집에서 이 남자 저 남자 상대하며 잔뼈가 굵은 무신(고두심), 유부남이든 홀아비든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매지(김혜옥), 어머니 매지의 우유부단함에 질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보려는 선경(공효진), 그리고 천성적으로 남을 도울 수밖에 없는(?) 채현(정유미). 모두가 이 영화의 당당한 주인공이다.
   
그들 여성들은 각자 할 말 많은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자칫 산만할 수 있는 이야기 흐름을 이리저리 잘 묶어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영화의 탄력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탄력을 유지시키면서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바로 예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여성들의 정情이다. 요즘은 서양을 닮아가느라고 쿨(cool) 한 게 유행이라지만 ‘쿨 함’(도대체 우리말이 되는가?)은 우리 체질에 안 맞는 것 같다. 닥종이 인형에 발레복을 입혀놓은 느낌이다. 그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한참을 같이 살다보면 비록 죽은 남편의 전 부인이 남긴 아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게 한국 여성들의 정 아닌가? 감독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동감할 수 있는 주제를 잘 선택했다.
    
그 외에도 감독이 생략의 묘미를 깨닫고 있다는 점을 칭찬할 만하다. 어린 채현이 마당에서 뛰어놀고 마루에선 미라와 무신이 함께 식사 하는 사이에 시간의 흐름을 특수효과로 묘사한 것이라든가, 문소리의 동생 태용(엄태웅)이 백을 세는 동안에 돌아온다고 하며 집을 나선 뒤 20여년 만에 돌아온 것이라든가, 대사 몇 마디로 등장 여성들의 인생역정을 담아낸 것은 좋은 시도였다. 그리고 류승범과 공효진이 나눈 대화에도 생략미가 한껏 살아났다. 두 사람은 “왜 그러는데?”와 “나 원래 그렇잖아!”라는 간단한 몇 마디로 한동안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흔들리는 감정을 적절히 처리한 것이 참으로 괜찮은 배우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시간을 앞뒤로 뛰어넘으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런 영화들이 많지만 연출기법에 아직 이름이 붙여지진 않았다. ‘시점時點 몽타주’ 쯤으로 부를 수 있을까?)은 영화편집에 대한 감독의 사전 연구가 치밀했음을 보여준다.
    
김태용 감독의 작품으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년) 정도밖에 알지 못하던 필자에게 ‘가족의 탄생’은 참으로 신선한 발견이었다. 아마 그런 재미에 젊은 한국 감독들의 영화를 즐겨보게 되는 가보다. 감독은 그 열정적인 창작력과 연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기 바란다. 젊은 감독들이 문제작 한 둘만 남기고 사라지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하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연기 잘하는 여배우들을 다 끌어 모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과 몸은 되지만 연기력 부재의 여배우들이 넘쳐나는 우리 영화계의 현실을 생각할 때 크게 위로가 되었다. 더불어 오늘날 강수연의 뒤를 이를 배우는 단연 문소리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동안 잠시 스쳐갔다.
   

인과응보-대안가족

   
앞의 세 영화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족 형태의 가능성을 보았다. 각각 북유럽의 작은 도시와 남극기지와 춘천 등 그 위치는 다르지만 새로워진 가족은 어디서든 우리의 편협한 마음에 바람 잘 통하는 시원한 공간을 제공한다. 도저히 가족 구성이 불가능한 조건에서도  중요한 것은 친밀함을 생산해내는 구성원의 의지이다. ‘가족’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각각의 영화에서 대안 가족의 가능성이 강하게 피력되었던 장면을 떠올려보겠다.  
   
‘남극의 쉐프’에선 별 별일이 다 벌어진다. 어떤 때는 수도원 같다가 어떤 때는 야생 동물들이 우글거리는 사파리 같다. 여덟 명이 처음 만났을 땐 서로에 대한 예의가 똑바른 게 점잖은 사교모임을 방불케 했는데 세월이 지나 서로 헤어질 때쯤엔 너무들 편해져 군 내무반을 연상시켰다. 그들은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고 곧잘 팬티 바람에 돌아다닌다. 한번은 아침식사 자리에서 변비로 고생하는 교통전문가가 방금 화장실에서 겪은 무용담을 사실적인 묘사와 몸짓으로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옆에선 두 사람이 사소한 문제로 마치 부부간에 말다툼 하듯 꼬치꼬치 따지고 있었다. 그래도 난폭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으니 모두들 정신마저 피폐해지진 않은 것이다.
   
관객 모두 느꼈겠지만 ‘가족의 탄생’은 페미니즘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가족을 만드는 존재는 여성이고 그들의 정과 끈기와 지혜가 가족을 형성하고 조화롭게 이끌어나간다. 흔히 남성들은 자기가 가족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철없고 무책임한 사람들일 뿐이다. 가족의 탄생은 그처럼 여성의 몫이다. 여성의 역할을 생각하고 여성성의 의미를 헤아려보게 만드는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특히, 세태에 따라 쿨 해 지려고 노력하는 한국의 남녀들은 영화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사만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만다는 그저 착하는 말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그녀는 아버지를 찾는 시릴의 여정에 늘 함께 하고 시릴의 막무가내 행동을 모두 받아준다. 종종 한국 양자를 받아들여 훌륭하게 키워낸 서양 부모들의 미담이 신문에 실리곤 하는데 아마 사만다는 그런 류의 사람일 것이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이를 거절 못하는 사람 말이다. 심지어 칼로 자신을 찌른다 한들 그의 맘은 변하지 않는다. 외롭고 거칠었던 시릴은 엄마를 갖게 되었고 ‘관용’이라는 말의 의미를 터득한다. 드디어 어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불교의 가르침에 나오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설명하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현재의 ‘나’를 빼도 박도 못하는 과거의 산물로 묶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인과응보는 과학 법칙이자 결정론決定論의 다른 이름이다. 앞의 세 영화는 결정론에서 과감한 탈출을 시도한다. 낡아빠진 가족 제도에 반기를 던진 것이자 대안의 가족을 찾아보려는 용기 있는 도전이다.
   
‘남극의 쉐프’에서 따로 근무를 나온 니시무라와 빙하학자 모토야마는 간식을 들며 대화를 나눈다. “오늘 저녁 무엇을 먹고 싶은가?” 라는 니시무라의 질문에 모토야마는 “나는 여기 먹으러 온 게 아니다.”라며 너스레를 떤다. 실은 매우 궁금하면서 말이다. 두 사람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새로운 가족이 가능한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