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예수님에 대하여)4. 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3)

(예수님에 대하여)4. 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3)

932
0
공유

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3)

 

예수님의 이름들을 둘러보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활동했던 예수님에게 붙여진 이름들로 나자렛 예수, 랍비, 예언자, 메시아, 놀라운 분, 베엘제불, 세리와 죄인의 친구 등등이 있고 그렇게 부른 나름의 이유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이름들 말고 또 다른 이름들도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실 독자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든가(요한 1:30), 누구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않는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든가(로마 10:9), 태초에 말씀이 하느님 옆에 계셨다는 구절도 성서에 나온다(요한 1:1). 이런 유의 이름들은 사실 예수님의 살아생전에 붙여진 이름들이라기보다는 부활 승천하신 후 교회에서 유행했던 이름들이다. 즉 신앙이 듬뿍 가미된 이름들인 것이다.

1세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해 했다. 왜냐하면 그 대부분은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거나 보았던 이들이 아니었고 유랑 전도사들의 선교를 통해 처음 교회를 나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분명하게 그분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쉽게 좀 설명해 주세요.’라는 요청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어졌음은 불 보 듯 빤한 일이다. 특히, 영원한 구원을 바라고 교회에 나온 이들에게는(대부분 그런 이들이었겠지만!) 매력적인 논리가 필요했다. ‘어린 양은 그런 요청에 잘 응답하는 이름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신과 소통하려면 그에 적합한 예식이 필요하고 그 예식을 주도하는 사제가 있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제사에서 사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인 셈이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는 일을 없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실 요즘도 성당에서 줄을 죽 서서 나가 헌금을 하지 않는가! 그렇게 거두어들인 정성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의 중간자로서 권위가 주어지게 된다.

그런 사제가 요구한다. 죄를 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야 하고 그 예물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야 한다. 이른바 속죄의 제사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관계로제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제물을 잡아 피를 뺀 후 내장을 분리한 다음 기름기 많은 내장 부분은 태우고 남은 살코기 부분은 수고한 사제의 몫이 된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보조가 필요한데 가난에 허덕이는 레위인들에게 맡긴다. 그리 되면 하느님은 제물의 연기를 흠향하셔서 좋고, 죄인은 자신의 죄를 씻으니 좋고, 레위인은 수고비를 받으니 좋고 나머지는 제사의식을 수행한 사제가 가져가니 좋다. 공평하지 않는가.

바울로는 그런 식의 제사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가 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기입니다.”(2고린 2:15-16). 말하자면 사람 스스로가 하느님께 드려지는 제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갖고 있다는 뜻이겠다. 그리 된 이유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빵을 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하셔서이다(1고린 11:24). 따라서 그리스도를 모신 이는 누구라도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방인 역시 더 이상 유대교의 제사의식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로마 1:16-17).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단번에 씻기신 대속代贖어린양이며 그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다시는 양을 바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우리 죄를 없애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유다교 율법 전통을 따라 성당에 올 때면 소, , 염소 등을 가져오고 신부들은 짐승들을 도륙 내 하늘에 바치느라 온 성당에 피 냄새와 동물기름 타는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제 후보생에게는 반드시 짐승의 목을 따고 포를 떠내는 고난도의 칼놀림 기술을 익히는 교육이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보라,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한 요한은 이 호칭을 통해 예수님의 존재를 그리스도 교회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미 이렇게 할 단초를 제공하셨다고 봄이 더 옳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공생애 말년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었고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했다(마르 11:15-16). 예수님은 상인들을 쫓아냈을 뿐 아니라 물건을 나르느라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행위도 금했던 것이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수를 구입하는 일뿐 아니라 제수를 바치기 위한 제기를 제단으로 나르는 일도 필수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일을 막아 제사 자체를 원천 봉쇄한 셈이니 제도권 유다교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불쾌한 도전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위선자들아, 마음이 실리지 않은 제사는 무엇 하러 드리느냐? 그럴 양이면 제물 구입이고 제기 나르는 일이고 당장 때려치워라!” 말하자면, 성전정화 사건에는 무의미한 제사 자체를 비판하는, 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의내린 1세기 그리스도인의 신념은 그렇게 든든한 뿌리를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