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예수님 영성, 우리 영성

예수님 영성, 우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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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영성, 우리 영성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신부님 한분이 기도하는 어린이 옆을 우연히 지나게 되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경건하게 무엇인가를 웅얼거리는 품이 제법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기도를 저렇게 진지하게 드리는지 궁금해 다가갔다고 한다. 그랬더니 아이는 가, 나, 다, 라 하면서 자기가 아는 글자란 글자는 다 외우고 있더란다. 그래서 신부님이 아이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아이야 너는 왜 기도는 하지 않고 글자만 외우고 있니? 기도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란다.”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강의를 하려는 순간 어린 꼬마가 대답했다. “신부님, 기도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오늘은 기도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아는 글자를 전부 하느님께 바치고 있어요. 하느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까 저 대신 글자를 모아 말이 되도록 짜 맞추실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엔 하느님과 예수님이 같은 분이라는 사상이 들어있다. 이 사상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100년경에 완성된 요한복음이다. 요한 1,1-2에 보면, “말씀(로고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라고 한 뒤에 곧이어 헬라어 ‘에이미’ 동사(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를 사용해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 한다. 여기에 의미심장한 전치사가 등장하는데 ‘함께’라고 번역된 ‘프로스’가 실은 ‘향하여’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로고스와 하느님은 일면 서로 마주보는 별개의 존재지만,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별개지만 하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 알쏭달쏭한 예수님의 정체설정을 325년에 제정된 니케아 신경에선 분명하게 설명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실체와 예수님의 실체가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호모우시온 토 파트리”(하느님과 일체이며)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여기서 ‘우시온’은 ‘있음’, ‘고유성’, ‘실체’ 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며, ‘호모’는 ‘하나’니까 결국 ‘동일 실체’라 번역할 수 있다. 그도 모자랐는지 두 분은 ‘휘포스타시스’(본질)까지 동일하다는 정의도 첨부했다. 그러니 예수님은 ‘창조되지 않고 나신(natum non factum)’ 분일 밖에! 따라서 만일 이런 가르침을 거부하는 몹쓸 무리들은 ‘보편적이요 사도적인(catholica et apostolica)’ 교회에서 파문되어 마땅하다. 예수 신성 사상을 담은 삼위일체 교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분명하게 설명한다면서 나온 니케아 신경은 요한복음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떤 성직자는 삼위일체 교리란 아버지가 집에선 가장이고, 회사에선 사장이고, 성당에선 사목위원이지만 실은 한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모양이다. 이게 과연 300여 명의 주교들이 모여 고도의 헬라철학을 동원해 정립시킨 ‘동일 실체’에 대한 적절한 은유인가?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분히 용감한 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삼위일체의 이론적인 기초를 놓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가르침 자체가 신비라며 하느님의 영역으로 넘겼다. 성인에겐 죄송한 말씀이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도 적절치 않은 겸손이다. 16년 동안 무려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삼위일체론>을 완성해 놓았으니 이미 성인 자신의 지력을 사용할 대로 다 사용해 설명한 셈이다. 그리고 막판에 ‘모든 게 신비!’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는 약간 비겁해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서양 역사가 자랑하는 대 학자답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도대체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면 할수록 이처럼 더욱더 어려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윗의 그리스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난해한 삼위일체 교리 풀이에 의아해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독자들을 혼란으로 이끌려는 게 아니라 필자의 논지를 진행시켜 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과정이다. 서구신학 식 설명으로는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만 가중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과연 예수님도 우리를 오리무중으로 몰아넣는 고약한 취미를 갖고 계셨을까? 진정 ‘들으면 들을수록 깨닫지 못하도록 만드는’(마르 4,12) 게 예수님의 가르침이 갖는 목적일까?

3년간의 공생애를 끝낼 즈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입성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예수님을 환영했는데 그때 부르짖은 환호성이 마르 11,9-10에 나와 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여기서 주목할 표현이 있는데 바로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이다. 예수님을 다윗의 현신인 메시아로 간주했고, 메시아란 마치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부국강병을 가져올 인물이었다. 곧,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칭송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수많은 인파를 끌고 대대적인 환영까지 받으며 입성했으니 정치적인 메시아로 간주될 만도 했다. 이렇게 사태가 다급하게 돌아가자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 직접 나서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메시아)가 맞는지 물어보았다. 그 대답이 마르 12,35-37에 실려 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율사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 자신이 성령에 힘입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도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임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오히려 다윗의 주님으로 선언한다. 한마디로 다윗조차 섬겨 모신 존재라는 것이다. 다윗의 찬양 시로 알려진 시편 110편 1절은 “야훼께서 나의 주님에게 요청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 편에 앉아 있어라.’”이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에서도 낯설지 않아 사도 2,34; 1고린 15,25; 히브 1,13 등에 거론되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는 더없이 뚜렷하다. 예수님을 평가하려는 무리에게 자신은 결코 평가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신 것이다.

긍정신학

인간은 어떤 사물이든지 정의가 안 된 채 놓아두면 불안해한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可知 범위 안에 사물을 끌어들여와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는 노릇이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 역시 예수님을 미지의 인물로 놓아둘 순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과거 역사에서 가능한 한 비슷한 인물을 찾아내 새 인물에게 적용시킴으로써 대상의 자리매김을 시도했다. 예수님의 경우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로 정체 설정을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당신이 다윗의 후손이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식의 정체 설정을 비웃으신다. 예수님은 과거 역사를 통해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한 정체 설정과 인간의 지력을 사용해 도달할 수 있는 범주를 훌쩍 넘어서시는 분. 인간의 노력으론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분.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가 정의를 내리든, 항상 그 밖에 계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신 대답이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습니까?”이다. 마르코 1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 정체 설정은 필자에겐 적어도 ‘삼위일체’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서양신학의 특징은 무엇이든 설명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 전능하신 분, 무소부재하신 분, 절대타자이신 분, 유일하신 분, 초월하시는 분, 인격신, 창조주 등등 그 정의만도 아마 수천가지가 넘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 괜히 서구신학에 ‘긍정신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게 아닐 성싶다. 물론 14세기 영국에서 씌어졌다는 <무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이나 하느님과 인간이 혼연일체가 되어 구별이 사라지고 말리라던 마이스터 엑카르트나 하느님을 신비의 영역으로 넘긴 아우구스티누스처럼 ‘否定신학’을 제창한 경우가 가끔씩 있었다. 이들이 서양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사상들이기는 하나, 주류는 역시 가본 적 없는 천당, 연옥, 지옥에 대해 하나하나 꼬치꼬치 서술하는 단테의 <신곡> 같은 ‘긍정신학’이다.

부정신학

공자님 말씀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가 있다. 論語 學而 편의 처음을 장식하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 朱熹는 四書集註에서 “說은 悅과 같다. 배움이라는 것은 본받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이 다 착하지만 깨닫는 것을 먼저 하고 뒤에 하는 자가 있어 뒤에 깨닫는 자는 반드시 먼저 깨닫는 자를 본받아야 이에 착한 것이 밝혀져 그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習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워서 그치지 않는 것은 새가 자주 나는 것과 같다…….”라 말한다. 주희의 장광설은 매우 난해하다. 과연 주희의 註解처럼 배우고 익히는 일에 이렇게 심오한 경지가 요구될까? 혹시 생전의 공자님은 그저 ‘책 읽으니 좋을시고!’라며 그저 자기 느낌을 진솔히 표현한 게 아닐까? 그런 예는 사실 얼마든지 있다. 해석을 붙이면 붙일수록 더욱 복잡해지는 경우 말이다.

긍정신학은 우리 심성엔 아무래도 어색한 듯싶다. 그리고 우리 영성에도 긍정신학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적당한 영성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정확히 정의내리기 보다는 그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편한 우리에겐 어떤 영성이 어울릴까? 아는 게 힘이지만 모르는 게 약이기도 한 우리네 정서엔 어떤 영성이 어울릴까? 혹시 영성을 언어로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영성의 본질을 규정하기보다 영성이란 그저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에 내재된 장치 정도로 그 기능적인 측면만 강조하면 족하지 않을까?

고운 정이 있으면 미운 정이 있고 아무리 때려죽일 원수라도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우리네 인정이다. 예수님도 그와 비슷해 하느님을 두고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마태 5,45)이라 했고 우리 인간은 상대적으로 머리카락 한 올도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마태 5,36).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과 세상과 인간을 자기입맛에 딱 맞게 정의내릴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심판대에 설 사람들이니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로마 14,10-11)고 한 바울로의 관찰은 참으로 탁월하다.

말로는 곤란해!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아랍 문학의 지주 격인 레바논 시인 칼리 지브란은 “‘서양의 정신’은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친구가 되지만 만일 우리들이 그것에 종속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적이 되며, 우리들이 그것에 마음을 열어주면 친구가 되고 그것에게 우리들의 마음을 굴복시키면 적이 된다. 또한 우리들에게 어울리는 바를 취한다면 친구가 되지만 그것에 알맞게끔 이용당하도록 우리들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면 적이 된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에 동서양의 차이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하느님은 예수님 말마따나 선과 악을 동시에 관장하시는 분이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 눈에 악으로 비쳐진다 한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악일 수는 없다. 하느님은 그런 식의 구별을 갖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선사들은 일찍이 언어의 한계를 파악하여, 오히려 언어로 지탱되는 논리를 깨뜨림으로써,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를 파괴함으로써 깨달음에 자유롭게 도달할 수 있었다. 不立文字의 차원이다. 하느님의 세계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절대타자로 초월하신 분이기에 마치 창문에 드리운 커튼이 바람에 날리면서 언뜻 밖이 보이듯, 그분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발가락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우리 영성은 제 몫을 다한 셈이다. 본디 언어란 믿을 게 못된다.

추억의 가수 김세환의 노래 중에 ‘좋은 걸 어떻해!’가 불현듯 생각난다. 구구절절 가사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디쯤 가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말로는 곤란해, 설명할 수 없어. 아마 이게 사랑인가 봐!” 진심이라곤 없이 혀 세치만 잘 놀려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치사한 남성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노래 가사이다. 마음에 와서 닿는 대목이다. 사실 이게 어디 남녀 간의 사랑뿐이겠는가! 언어에 기대는 습성을 버려야 하느님에 대한 통찰력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말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