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김영호박사 칼럼 예수처럼 사는 교회

예수처럼 사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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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요한1서 2:6)

제가 사는 원주의 아파트에는 TV가 유선방송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각 가지 방송이 다 들어 오는데, 기독교방송, 카톨릭방송, 불교방송도 들어 와서, 가끔 모두 시청을 하기도 한답니다. 사실 한국에 돌아 올 때, 이런 결심을 했는데, 그게 무어냐 하면, 남이 쓴 책을 읽지 말자, 그리고 신문을 보지 말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8년 동안, 이 결심을 잘 지켜오고 있는데,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조금은 알아야 하겠기에, 시간이 맞추어지면 주로 TV 뉴스를 시청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불교방송을 들으면, 방송의 초점이 부처에게 맞추어져 있고, 카톨릭방송을 들으면 방송의 초점이 예수에게 맞추어져 있답니다. 부처를 전하는 불교방송, 예수를 전하는 카톨릭방송인 셈이지요. 카톨릭방송이 예수를 전한다고 하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몇 년 전, 경기도 기흥에 있는 강남대학교에서 기독교교양과목을 강의할 때였는데, 어떤 학생이 이렇게 물었었지요.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데, 왜 카톨릭은 마리아를 믿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일단 학생의 질문부터 고쳐야 하겠는데, 기독교 안에는 크게 세 가지 종파가 있는데, 카톨릭(Catholic)과 정교회(Orthodox) 와 개신교(Protestant) 입니다. 그러니까 카톨릭도 기독교요, 개신교도 기독교랍니다. 카톨릭이 정말로 마리아를 믿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카톨릭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니까, 다음 시간에 수녀님 한 분을 모셔 올 테니, 그 때에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그 다음 시간에 수녀님을 모셔 갔는데, 그 학생이 꼭 같은 질문을 하자, 수녀님이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는 카톨릭방송이라는 말이 이제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지요? 그렇다면 기독교방송은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기독교방송의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어야 할까요? 물론 예수여야 하겠지요?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기독교방송이 전하는 메시지여야 하겠지요? 한국에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개신교가 전해진 이후부터,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쟁이” 라고 했지요.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 했었지요. “기독교”의 “기독” 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계시지요? 언젠가 어느 교회에 강연을 가서, “기독” 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어느 집사님이 “기도” 라는 말을 액센트를 주어서 말한 것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기독”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라는 말을 중국말로 음역한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이고, 그리스도가 곧 예수이시니까, “그리스도교”는 “예수교”와 같은 것이지요. “기독교 장로회”라는 말과 “예수교 장로회”라는 말은 본래는 꼭 같은 말인데, 지금 한국에서는 서로 다른 교파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지요. 어떤 외국의 신학자가 한국의 교회들을 가리켜, “기독”과 “예수”가 서로 싸우는 교회라고 하기도 했었지요.

기독교방송은 예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하겠는데, 사실상 방송을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답니다. 각자가 듣는 것이 다르겠지만, 제가 들어보니까 기독교방송의 초점은, 성경말씀을 믿고, 목사님의 말씀을 믿고, 교회에 나가라는 것 같습니다. 성경말씀을 믿고 목사님의 말씀을 믿고 교회에 나가라는 것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불교방송을 들으면, 부처님이라는 말이 수 없이 들리고, 카톨릭방송을 들으면 예수라는 말이 수 없이 들리는데, 기독교방송을 들으면 예수라는 말이 안 들린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어느 목사님에게 했더니, 종교개혁 시대의 카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오늘날에는 거꾸로 된 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몰라도 되는 교회, 예수를 전하지 안 해도 되는 교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교회, 예수가 빠져버린 교회가 오늘날의 개신교 교회의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의 가르침” 이라는 책을 썼지요. 예수의 가르침을 배워 행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예수의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행전 1:8)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 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같이 올라 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지금 우리 백성들 앞에서 예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행전 13:31)
우리들 주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고 그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여호와 증인”이 있지요. 사실은 말이 여호와 증인이지,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기보다는 요한계시록을 전하고 있으니까, “요한계시록 증인”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들 주위에는 목사님을 전하고 그 목사님을 따르라고 하는 “목사님 증인”이 참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훌륭하다고 소문나면 그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그런 교회의 사람들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목사는 어떤 분이다 하며 전도하고 있지요.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는 “목사님 증인”들인 편이지요. 사실은 한국의 카톨릭 교회에는 외국의 박사학위를 가진 수많은 신부님들이 있지만, 우리에게 널리 개인적으로 알려진 신부님들이 별로 없지요. 카톨릭 교회의 사람들은 “신부님 증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주위에는 자신이 나가고 있는 교회를 전하는 “교회 증인”도 많이 있습니다. 이 현상은 대형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그들에게 있어서 전도란 “예수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나오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대형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말입니다. 세계의 10대 대형교회 리스트의 대부분이 한국교회들인데, 한국교회의 특징은 “교회 증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교파만이 참 진리의 길을 가는 곳이라고 전하던 “교파 증인”들, 성경은 글자 한 자, 한 획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영감으로 듣고 기록하였다고 전하던 “성경 증인”들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그 세력이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저 웃으며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여호와 증인이 이단이듯이, 목사님 증인, 교회 증인도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이 아니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특별히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의 구원자와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행전 1:21-22)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행전 4:3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도자와 구세주로 세워 당신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셔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 죄를 용서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행전 5:31-32)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날마다 성전과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행전 5:41-42)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행전 10:41-42)
더 이상의 말씀을 찾지 않더라도, 초대교회가 증거한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에게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역사적으로 한 때 살았던 예수, 신학에서 말하는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 에게만 한정된 메시지가 아니라,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시고 일하시는 “살아 계신 예수” (living Jesus) 에 대한 증언의 메시지였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 일을 사도들에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자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계신 예수” 에 대한 증언은 그와는 다릅니다. “살아 계신 예수” 에 대한 증거는 예수께서는 아직도 그분의 일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는 예수” 에 대한 증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마가 16:19-20)
아나니아는 곧 그 집을 찾아 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보내셔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행전 9:17)
어느 날 밤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으로 바울에게 나타나 “겁내지 말라. 잠자코 있지 말고 전도를 계속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너에게 손을 대어 헤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 (Jesus People) 이 많다” 하고 말씀하셨다. (행전 16: 10)

초대교회는 옛날에 살다가 돌아가신 예수를 증언하는 교회가 아니라, 옛날에 사시던 그 예수가 아직도 살아서 그분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들의 교회도 이같이 “살아 계신 예수”를 증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증언은 오늘도 우리들 각 자의 삶과 교회공동체의 생활 속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를 깨닫고 이를 남들에게 증거하는 “간증”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사람들이 행하는 “생활 나눔”은 살아 계신 예수의 손길을 함께 느끼게 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1서>의 말씀에서는 “살아 계신 예수”를 증언하는 방법으로 “예수처럼 사는 우리의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요한일 2:6)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일 4:17)
이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한일 3:16, 18-19)
“예수의 증인이 되는 교회” 는 곧 “예수처럼 사는 교회” 이며, “예수처럼 사는 교회” 는 바로 “사랑하며 사는 교회” 임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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