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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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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마르 10,13-16: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대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시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왕따와 폭력성

윌리암 G. 골딩(1911-1993)이 쓴 <파리대왕>에 보면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나온다. “여하튼 숲속에서 사냥을 할 때는….. 물론 과일을 따먹을 때를 말하는 게 아냐. 짐승을 쫓고 있을 때에는 그냥 어떤 느낌이야.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냥을 당한다는 느낌을 갖게 돼. 마치 숲 속의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파리대왕>은 우연히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소년들의 모험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惡을 가시화시킨 소설로 유명하다. 앞의 독백은 힘과 공포를 앞세워 소년들의 지도자가 된 잭의 입에서 나온 말로, 과일을 딸 때와 멧돼지를 사냥할 때 드는 천양지차의 느낌을 토로한 것이다. 문명의 때가 벗겨지고 폭력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지점에 이 독백은 위치한다.

요즘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다. 왕따에 시달리던 어린 생명이 자살한 사건에서 촉발된 것으로, 그 혼란 속에 들어가 보니 피해 학생들의 범위가 30만 명이나 되고, 모두들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으며, 학교의 무관심에 피해자 부모들이 놓인 속수무책의 상황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 급조된 대책 등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교육에 총체적 위기가 닥친 셈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까?

위기 상황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등장하면서 눈길을 끌었던 점은 가해학생들의 뇌 구조에 관한 보도였다. 가해학생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거나 폭력을 자제하는 능력을 관할하는 부분의 모양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연구결과다. 즉, 가해학생의 전두엽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보도는 피해학생이 신고만 하면 가해학생을 전학시킬 수 있게 특수학교를 만든다는 조치다. 그래서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자연스럽게, 뇌구조가 달라진 폭력 인간들을 수용소에 격리하겠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혹시 삼청교육대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인가?

어린이는 누구인가?

어린이에 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은 복음서에 많이 나오지 않는다. 몇몇 기억나는 구절들로는 우선 예수님의 ‘감사기도’(마태 11,25-27) 중에 나오는 “슬기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어린이들(네피오이)에게는 이것을 계시하셨으니 감사합니다.”(25절)가 있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주제로 다룬 마태 18,1-5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어린이(파이디온)와 같이 자기를 낮출 것이며, 또한 누구든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한다.

학계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이 한 결 같이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자들이며 하느님의 계시는 이른바 슬기롭다는 세상 똑똑이가 아니라 어린이처럼 조금 부족해 보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면 곧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며, 혹시라도 제자들을 잘못 건드리면 경을 치고 말 것이다.

이는 분명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 교회 안에서 그분의 권위를 이어받은 존재로서 제자들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편집된 내용들이다. 그러나 뚜렷한 편집 목적을 띠고 전승들이 복음서에 실렸다 하더라도 그 배경에는 반드시 역사적인 사실이 하나쯤 들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은 예수님이 어린이를 불러서 축복한 마르 10,13-16이다. 어떤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와 축복을 부탁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를 막았는데 보나마나 자기 자식에게만 축복을 받게 하려는 부모들의 이기심을 얄밉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고, 어린이들이 몰려들어 자칫 문란해질 질서를 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무라고 한 어린이를 성큼 안아 축복을 내린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어떤 면을 보았기에 이런 말씀을 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풀이해 내는 데 힘을 쏟아왔다.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가 바로 진정한 제자들이다, 어린이들이란 소외 계층이다, 어린이는 율법의 의무가 없는 사람들이다(=그리스도인), 어린이는 죄가 없다, 어린이는 혈기를 부리지 않는다, 유아 세례의 근거를 제공하는 구절이다, 아니다. 세례는 어른이 되어 다시 받아야 한다(재세례파), 재세례파는 알지도 못하고 떠든다(깔뱅) 등등.

어린이가 누구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초세기 교부들의 견해는 그 중에서도 생각할 바를 많이 남겨준다. 치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께서 어린이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축복을 하신 방법을 끊임없이 강조했는데 온전한 자유의지를 갖지 못한 채 주님께로 온 이들은 아직 스스로를 회개로 이끌 자발적인 행위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나서서 이들을 열심히 도와야만 한다.

나게 오도록 놓아두시오

어린이는 아버지가 빵을 준다면 빵을, 생선을 준다면 생선을 받으려고 손을 내민다. 혹시 아버지가 나를 속여 빵 속에 돌을 넣었거나 뒤에 뱀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따윈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눈에서 의심 없는 믿음을 보았다. 그래서 마치 어린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면 누구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장담을 한 것이다. 다만 어떻게 그들을 이끌어야 할 것인가의 책임은 어른들에게 넘겨져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좋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워서는 곤란하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 귀한 줄 알아야 하고,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키워야 한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얼룩을 묻혀서는 안 된다. 어린 것들이 포르노 비디오를 만들다니, 미성년자가 몸을 팔다니, 학교 폭력 때문에 애가 죽다니 하면서 어른들은 세태를 한탄한다. 그러나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포르노 비디오를 만들고 ‘영계’만 고집하는 수요가 없는데 어떻게 미성년자 윤락행위가 등장하며 왕따를 방기하는 풍조가 없다면 어떻게 학교 폭력이 난무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왕따의 아픔을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내지른 단말마의 외침들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들어도 못들은 척 외면했다. 아마 진상이 낱낱이 파헤쳐질 경우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그러더니 이제는 가해학생들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면서 급기야 특수학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난리들이다. 이런 근시안 조치는 어쩐지 ‘도가니’ 영화의 결과로 인화학교를 폐쇄한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천 년 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해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따라온 어린이들에게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아이가 일어나 나비를 쫓기 시작했다. 그 아이를 따라 몇몇이 더 일어나더니, 이제는 자기들끼리 서로 잡으려고 소란스럽게 뛰어다녔다. 이때 장내 질서를 책임지고야 말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들의 엄숙한 제자들이 나서서 말썽장이 어린이들을 격리시키려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을 흔들며 어른 제자들의 지나친 의무감에 제동을 걸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시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넉넉한 마음 밭을 가진 예수님의 말씀이다.

로마의 어느 사원을 발굴했을 때 어린이들의 유골이 나온 적이 있었다. 시인은 그 유골들에게 로마에 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자기가 먼 옛날, 그 위대한 로마 제국의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너희는 살아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무엇을 생각했었느냐?
로마는, 로마는 어떤 도시였느냐?

우리들은 몰라요, 우리들은 어린이였으니까.
오늘날 어린이나 내일 날의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뛰어 놀거나
나비를 쫓아다녔을 뿐, 아무 말도 할 게 없어요.

나는 인형에 대해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공놀이와 바퀴 굴리기를…

도미니코 리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