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5주일> 요한12:1~8
겉과 속
일본말에 혼네와 다테마에가 있습니다. 혼네(本音)란 개인의 본심을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 다테마에(建前)란 사회적 규범에 의거한 의견으로, 겉으로 드러난 생각을 말합니다. 예컨대 공식회의 석상에서는 상사의 의견이나 회사방침을 따르는 듯한 ‘다테마에’를 말한 사람이 회의가 끝난 후 동료들과 술 마시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상사나 회사를 비판하는 ‘혼네’를 드러내는 일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이중적 자세는 전체의 조화를 위한다는 미덕이라고 하지만, 신 앞에 솔직함을 추구하는 기독교 윤리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구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 여당의 한 의원이 전화통화에서 자신의 당대표를 “죽인다”, “솎아낸다” 등의 막말을 써가며 본심을 드러내서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평소 대통령과 당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던 모습과 너무나 동떨어진 흡사 동네 불량배만도 못한 언행에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와 이것을 못마땅히 여긴 가리옷 사람 유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절을 보면, 유다가 “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라고 마리아를 꾸짖고 있습니다. 평소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비추어 볼 때 유다의 말은 언 듯 듣기에 타당한 것 같습니다. 만일 요한 복음 사가가 6절에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라고 부연 설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더욱 유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유다의 혼네와 다테마에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겉으론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발언을 하고, 돈의 효과적인 쓰임새를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혼네는 자신의 이익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혼네, 그들의 속마음은 자신들 밥그릇을 더 차지하기 위한 탐욕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8절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늘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치가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합니다. 경제인들은 가난한 사람도 고용이 되고, 정당한 급여를 받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들도 어린이, 노약자, 힘없는 여성, 그밖에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보다 약자인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만일 그러한 정치인들의 말이 진실하다면 왜 우리 정치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만일 그러한 경제인들의 말이 진실하다면 왜 회사 내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되고 있지 못하는 걸까요? 만일 우리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면 왜 우리 사회는 이른바 ‘갑질의 횡포’가 여전히 횡행하는 걸까요?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두 가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에 나온 가롯 유다는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유다처럼 우리의 탐욕스런 혼네는 마침내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탐욕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거라는 불행한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앞서 제가 최근 일어난 어느 국회의원의 막말사건을 언급했습니다. 그 국회의원은 은밀한 공간에서 자신의 당 대표를 죽이겠다, 솎아내겠다 등의 섬뜩한 혼네를 발설했습니다. 그 섬뜩함, 그 악마성에서 우리는 가롯유다를 다시금 봅니다. 가롯유다가 결국 자신의 스승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그의 그러한 섬뜩한 말이 정치가 해야 할 본연의 숭고한 사명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올해 사순절도 곧 있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자신의 어두움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오늘 가롯유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의 길은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는 은총의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 발 앞에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붇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남동생 라자로와 언니 마르타와 함께 살고 있는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풍습과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 자매의 삶은 실로 절망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위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로 인해 아마도 그녀는 깊은 마음의 상처와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와 그녀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육신의 병, 마음의 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모셨고, 그러한 주님이 예루살렘을 가시는 길을 어쩌면 크나큰 불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어쩌면 이 시간 이후로 주님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닦아드렸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가롯유다와 같은 탐욕의 혼네를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간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값비싼 나르드 향유보다 더 귀한 향유로 우리의 더럽혀진 속마음을 깨끗이 닦아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예수님 발 앞에 다가가 거짓과 위선으로 가려진 우리를 솔직히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간구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탐욕 때문에 우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예수님은 다시 우리 곁에 올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오늘 독서는 다음과 같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사막에 물을 대어주고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들이리니, 뽑아 세운 내 백성이 양껏 마시고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들이 나를 공경하리라.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이사43: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