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연중 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연중 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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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5주일)/이사58:1-12, 1고린2:1-12, 마태5:13-20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우리가 전자제품을 사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은 사용지침서입니다. 이것을 봐야 어떤 때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신앙지침서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가르쳐 주신 삶의 지침서입니다. 주님은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그리고 분명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보면 창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흙먼지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창문을 작게 만들고 그 대신 집안을 밝히기 위해 늘 등불을 켜두었습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이들에게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양념이었습니다. 때문에 “너희는 빛이라고 했을 때, 그리고 소금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씀을 했는지 그들은 금방 떠올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지경을 넓히라는 말을 합니다. 나라고 하는 틀을 넘어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이 때 조건이 고향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지경을 넓히라는 말씀입니다. 나라고 하는 틀을 넘어 우리라고 하는 세상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이해하지 못한 말이 우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한참이 걸린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 남편, 우리 아들, 우리 엄마라고 합니다. 남편이 다부 다처인가? 서양에서는 내 아들, 내 남편, 내 엄마라고 하지 우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로 보는 마음, 이것이 하늘마음입니다. 내 아들이 아니라 우리 아들이 되야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고, 사람을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아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들도 내 아들처럼 여기는 마음,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내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되야합니다. 그래야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쓸 수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습니다. 정말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린 신부라고 생각했습니다. 8년간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봉사활동을 펴다 얼마전 대장암으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그가 보여준 삶은 빛이었고, 소금이었습니다. 의사로써의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한 사제가 되어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세상과 다른 눈..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대한민국을 넘어 아프리카를 우리나라로 가슴에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꿈꾸는 세상, 바로 우리였습니다. 우리로 묶어 주는 것은 핏줄이 아닙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 하나가 되면 우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가족이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남종도 여종도 주인도 어른도 아이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처럼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아껴주고, 나누며 돕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우리가 되야합니다. 빛고 소금, 세상을 가슴에 안을 수 있는 큰 이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은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어디에서 꼭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가정에서, 일하는 일터에서, 우리가 섬기고 있는 이 교회에서 나는 꼭 필요로 하는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의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명의 하인이 있었는데 양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물으니 한사람은 책을 보다가 잃어버렸고, 또한 사람은 놀다가 잃어버렸고 했습니다. 그들이 책을 보았던 놀았던 분명한 것은 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양을 잃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종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도 아니고, 노는 일도 아닙니다. 양을 보는 일을 해야합니다.

 

이처럼 빛과 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할 때 쓰임을 받지 못하는 빛과 소금은 쓸모가 없습니다. 가끔가다 대 낯에 켜 논 가로등을 본적이 있습니다. 정말 쓸모없습니다. 얼마 전 등산을 갔는데 소금을 빼놓고 왔습니다. 정말 싱겁고 맛없는 밥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지만 내 생에 그렇게 맛없는 밥은 처음 먹어보았습니다. 집에 소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합니까? 정말 필요할 때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처럼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은 꼭 필요할 때 쓰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위대함은 무엇을 많은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식한 지식을 가졌다 해도, 또 세상을 바꿀만한 재물이 있다 해도 쓰여야할 때 쓰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를 용서하십시오. 지금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십시오. 지금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에게 지금 도움의 손길을 주십시오. 지금 회개해야할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회개하십시오.

 

미루지 마십시오. 소금과 빛이 지금 필요한 것처럼 바로 지금 필요한 일을 행하십시오. 빛과 소금이란 적당할 때에 적절하게 쓰여 질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넷째,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음식이 맛있다 해서 소금을 칭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영광은 조리를 한 조리사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모든 행실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나를 영광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도 핀잔을 듣는 것은 내 영광을 위해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끝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등불이 빛을 낼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소금이 맛을 낼 수 있는 이치는 자기 자신을 버릴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소금 싸우나를 가보셨나요. 소금으로 벽을 만들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온을 쬐는 방법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도 이런 가마를 만들어 빵을 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3년이 지나면 소금벽을 거두어 내고 새로운 소금으로 벽을 만들곤 했는데 이때 소금은 쓸모가 없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돌처럼 굳어져 녹지 않기 때문이지요. 소금의 모양은 있는 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말하고, 정의를 말하고, 온갖 말씀의 진리를 다 전한다 해도 결국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삶이 없으면 맛을 잃을 소금처럼 조롱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은 소금의 모양이 아니라 소금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태우는 등불처럼, 맛을 내기 위해 자기의 몸을 녹여야 하는 소금처럼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싶다면 그리고 맛깔나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온갖 신비를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내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됫박으로 덮어두면 그 등불은 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고 싶어도 유혹의 덧에 걸리면 그 불은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유혹하는 영을 주의 해야합니다. 타오르는 불꽃은 단번에 꺼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등불은 등경위에 걸어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등경위에 등불을 걸어두어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빛과 소금은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유익하게 합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은 남을 유익하게 해야합니다. 세상을 유익하게 하고 이웃을 유익하게 해야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들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고, 상처는 금시 아물고 살려 달라고 외치면 살려주리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유익함을 주십시오. 그것은 곧 나에게 축복이요, 모든 사람을 향해 비추는 찬란한 빛이요, 맛깔나게 하는 소금입니다.

 

이 세상이 어둡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때, 누군가가 이들과 자신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이 세상은 밝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맛깔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박희준 선생님이 쓴 “하늘 냄새”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그렇습니다. 거짓 없이 맑고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는 정말 하늘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하늘 냄새를 풍길 수 있는 사람,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아름다운 사람,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12장 2절 말씀을 묵상합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삶이 되야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불러주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없는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고 구원 받은 백성이요, 하느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다면 하느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단을 밝히고 있는 촛불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촛불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날마다 다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