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우리에게 필요한 징표

우리에게 필요한 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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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징표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마르 13,28-31: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TV 홈쇼핑에서 ‘러닝머신’을 산 적이 있다. 그런데 석 달 뒤쯤 기계가 고장 나 A/S를 부탁했더니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놀랍게도 “아니 아직도 그 기계를 사용하고 계세요?”였다. 아연실색 했다. 말하자면 상품 판매를 할 때부터 기계의 사용 한계가 한두 달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판매자 측에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러닝머신’은 요즘 베란다 한구석에 쓸쓸하게 처박혀 있는 상태다. 한 때 온 가족의 건강을 책임져줄 것으로 기대했던 유망주가 이제는 고작 빨래걸이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홈쇼핑 채널을 보면 으레 등장하는 멘트들이 있다. 날이면 날마다 접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특별 기획 상품이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았으니 주문을 서두르기 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면 하단에 남은 상품의 숫자와 초시계가 등장하면서 쇼 호스트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한다. 사실 이쯤 이르면 아무리 평상심을 자랑하는 시청자라 할지도 초조해지기 마련이고 결국 전화기를 들고야 만다. 그리고 한 시간쯤 뒤엔 살림살이에 절실하게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사고 말았다는 후회가 들기 마련이다. 그리곤 다음날 고객의 성원에 보답해 특별히 내년 판매 분량을 미리 내놓기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방송이 나온다. 교활한 상술에 멋지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이 반복될까? 바로 위기감 때문이다.

사실 위기감 조성 분야의 진정한 선구자는 그리스도교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왕권과 부패한 상류층에 맞서 곧 들이닥칠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을 경고했고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간주되는 세례자 요한 역시 곧 다가올 심판을 예언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가 3,9)

두 단계 종말

예수의 말씀 중에 곧 들이닥칠 종말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한 곳으로  단연 마르코복음 13장의 ‘종말설교’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13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종말의 날이 두 단계로 도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말의 첫 단계를 다룬 14-23절은 우선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의 흉물이 서 있는”(14절)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꼴을 보거든 즉시 도망을 가야 하는데, 얼마나 급한지 마침 들에서 겉옷을 벗고 일하던 이는 그 옷을 내버려 둔 채 도망을 쳐야 하고, 지붕에서 일을 하던 이들은 집에 들어갈 겨를도 없이 줄행랑을 놓아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말까다. 그 때 벌어질 재난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또 없을 것이니, 곧 전무후무한 엄청난 재난이 들이닥치고, 적敵그리스도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이리저리 설치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과 종말의 첫 단계일 뿐 곧이어 종말의 둘째 단계가 시작된다. 첫 단계에서 묘사되었던 “환난에 뒤이어” 종말의 두 번째 단계인 24-27절에 나와 있는 바에 따르면, 바야흐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인자가 영광에 싸여 세상에 내려와 심판의 칼을 휘둘러 선민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이처럼 종말 사건은 모든 권세를 굴복시키는 인자 예수의 재림으로 그 완성을 이루게 된다.

두 단계 종말을 그 성격으로 정리해 보면 첫 단계는 전쟁의 발발이나 적그리스도의 출몰 등 세상의 역사가 꺼지는 종말 사건이고, 둘째 단계는 천체가 온통 흔들리고 인자가 영광에 싸여 천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등 우주의 역사가 끝을 고하는 종말 사건이라 하겠다. 세계내적 종말 -> 우주적 종말로 연결되는 이 두 단계의 종말관은 물론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사건들로, 종말이 갖는 미래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말설교’에서는 종말을 단순히 미래에 벌어질 사건으로 남겨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미 그 구체적인 징조가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마르 13,5-13).

현재에 나타나는 징조들로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들이 많이 출몰하고, 전쟁이 곧 벌어지리라는 소문이 무성해지며, 지진이 생기고 기근이 들며, 가족 내에서까지도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의 상황에 놓여 법정이나 회당으로 넘겨져 매를 맞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사람들에게 끌려가 넘겨지기는 하겠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성령이 알아서 준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데 우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만 하며, 종말까지 이런 일들(박해)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마침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란 종말의 징조가 이미 벌어지고 있을 정도로 급박한 시간대이기는 하나 준비할 시간이 아직 약간 남은 셈이다.

시대의 징표

앞서 보았듯이 예수의 종말설교에서 미래성과 현재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미래에 종말이 들이닥칠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하느님 외에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그저 당대에 일어나고 있는 징표들을 잘 살펴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보면 1992년 10월 28일에 최후심판이 벌어진다고 한 다미선교회나 2012년 12월 21로 종말을 예견한 마야의 달력 따위는 모두 허무맹랑한 소리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예수의 말씀을 그저 교인들 각자 해결하도록 자유에 맡겨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시때때로 임박한 종말을 강조해 교인들 사이에 위기의식을 높여온 게 사실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당 내부에 으레 종말 심판 장면을 현장감 넘치게 묘사하는 대형 벽화와 천장화를 그려 교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종말 심판을 앞당겨 한다면서 수많은 이단을 처리한 바 있다. 요즘 들어서도 가끔씩 그런 일이 있다. 우리나라 최대 발행부수 신문에 전면광고를 내는 어느 목사님은 자기변호와 더불어 종말 심판에서 그간 자기를 괴롭혔던 악의 무리가 모두 척결되리라 예언하고, 담임목사직 부자父子세습의 원조 격인 어느 원로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종말 심판을 강조한다. 한 가지 묘한 공통점은 이들 목사님들이 언제나 북한의 위협을 강조해 위기의식을 증폭시키는 데서 발견된다. 북한의 무력충동이 드세어지는 게 종말이 가까워진 증거라는 논리다. 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대의 징표란 무엇인가? 예수는 분명 종말을 예고했고 종말에 벌어진 끔찍한 양상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과제는 미래의 종말이 어떤 형태로 닥치는지 궁금증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종말을 준비하는 자로서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는가에 있다. 만일 종말설교를 접하면서 미래 예측에만 온 힘을 기울인다면 신통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아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종말을 예견하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었다. 나무에 일어난 변화를 보고 계절을 짐작하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달리 여름이 추수의 계절이자 시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은유로 종종 사용된다. 무화과를 거두어들이는 시기도 맥락을 같이 해 여름이 가까워지면 수확 때를 아는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어설픈 국가경영 덕분에 우리는 불필요한 고통을 겪었고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굳이 비교하면 겉만 번지르르 하고 속엔 거짓말과 위기감 조성이 가득한 홈쇼핑 같았다.(물론 일부 상품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이제 새로운 대통령이 나라를 맡아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했으니 신선하고도 건강한 징표들이 주어졌으면 한다. 괜한 공포 분위기 조성도 반갑지 않고 갑작스런 여론몰이도 지겹고 겉과 속이 다른 이벤트성 선심정책도 사라졌으면 한다. 대신에 ‘이번 정부는 진실이 살아있네’ 라는 느낌을 건네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징표이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