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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고요!(연중 7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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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7주)/ 레위19:1-2,9-18; 1고린3:10-11,16-23;마태5:38-48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7살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고 있습니다. 중학교 학생도 하기 어려운 공중 회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치는 이 어린이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봅니다. 미래 휘겨 스케이트를 빛낼 재목으로 본 것입니다. 바로 그 어린이가 김연아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싹수가 보이다고 합니다. 이처럼 싹수가 보이는 신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싹수가 보이는 신자가 되려면 참된 사랑의 길을 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자를 보면 구원이 보이고, 축복이 보입니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인자를 비교했습니다. 그랬더니 1%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 1%의 차이가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참된 사랑을 이루려면 1%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1%에 의해서 세상적인 사랑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왜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랑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통로, 구원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빛이 생겨라!”라고 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나거라!”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만드셨기에 하느님이 만드신 창조물들이 이렇게 좋았을까요? 이렇게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모든 것이 번성했을까요? 바로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말씀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요,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 사랑이 생명이 됩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치유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그리고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회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찬례를 통해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십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보혈을 먹고 마십니까?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의 영으로 내 마음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도 전서 13장 1절 이하에서 사랑의 신비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가야할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합니다. 지식도, 능력도, 믿음도 이 사랑을 통해 완성이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진 지식과 능력과 믿음이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길을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 있습니다. 바로 미움과 증오, 그리고 이기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사랑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1%를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왜 누가 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주라고 했을까요? 왜 남에게 바라는 대로 해 주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왜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넘어야할 마지막 1%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우선 사랑하려면 분노와 증오를 버려야 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독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고 좋은 음식이라 해도 독이 들어가면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분노와 증오가 그렇습니다.

뺨을 맞아보셨습니까? 뺨을 맞으면 불이 번쩍 나지요. 그 순간 분노와 증오가 나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나에게 다른 뺨을 때리라고 내어 주리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비굴하게 살라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분노와 증오를 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불속에 들어가도, 내가 가진 재산을 다 나누어 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할지라도,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증오한다면 그 행위는 더 이상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분노와 미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다른 뺨을 마저 대 주라고 하십니다. 뺨을 맞아 화가 나있는 사람을 향해 다른 뺨을 대주라니요? 그런데 바로 여기에 분노와 증오를 극복할 수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여러분 분노와 증오를 끊어버리려면 그것을 끊을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분노와 증오를 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때린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나만이 그 분노와 증오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변화되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게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누구를 굴복 시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이 굴복하면 용서할 수 있다고요, 저 사람이 변화되면 용서할 수 있다고요.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분노와 증오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뺨을 맞으면 어떻습니까? 나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저 사람을 굴복시키고 싶습니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사실 누구에나 모욕을 당한 사람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의 뺨을 치면 나도 치고 싶은 겁니다. 이래야 그나마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잠시 위로는 될 수는 있어도 분노와 미움을 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순간 또 다른 분노와 미움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와 미움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른 뺨을 대 줄 있어야 합니다. 용서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는 한 미움과 증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용서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 하라는 성인의 가르침이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경험보다는 아픈 상처를 더 잘 기억합니다. 나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어도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의 뺨을 친 그에게 뺨을 다른 쪽을 대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내가 받은 상처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에 집착하는 한 나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줍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총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형제들을 용서하는 대목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넘깁니다.

그 때문에 요셉은 겪은 고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이 상처에 매달렸다면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런 아픈 상처들을 버렸습니다. 자신을 배반 했던 형님들, 그로 인해 자신이 당한 고생들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성도는 자고로 해석을 잘해야합니다. 그 해석에 따라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님, 나를 팔아넘긴 거, 형님이 아니야.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야. 만약에 형님이 날 팔아넘기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겠어.”

 

저는 이 대목에서 다른 뺨을 대주는 요셉의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형제와 화해했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미운사람이 있나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자신을 조롱하던 사람들을 용서하신 주님처럼 증오와 미움으로부터 떠나야합니다. 용서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려면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왜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되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주는 그런 일을 멈추라고 하셨을까요?

이런 이기적인 마음, 자기 공로를 드러내려는 마음으로는 결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보면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듣는 주의 사항은 아이들을 껴안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만지고 나면 얼른 손을 씻어야 합니다. 병균이 옮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안기는 걸 좋아합니다. 나 또한 그 앙상한 아이들을 안을 때 슬프고도 행복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 바로 이런 모습이 하느님께 인정받는 선행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내 입장에서 아이들을 보았다면 어떻게 안아줄 수가 있겠습니까? 더러운 아이들, 병균이 득실거리는 아이들이라는 편견을 가졌다면 어떻게 안아 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내가 아니라 아이들 입장에 설 수 있을 때 그 아이를 안을 수 있고, 미라처럼 비쩍 마르 냄새나는 아이들 안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말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슬프고도 행복합니다.”

아마 김혜자씨가 슬프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야 하는 현실이 슬펐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현실은 바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동내, 내 나라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이런 슬픈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병들고 굶주리고 죽어가는 이 아이를 주님의 사랑으로 안을 수 있는 사랑이 있어 행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변질되면 독이 되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도 나만을 생각하는 사랑은 독이 됩니다. 이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사랑도 내 자식만 사랑하는 이기적 사랑이 될 때, 자신도 자식도 남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 빛나지 못하는 것은 이기심이란 커텐으로 빛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로의 말씀처럼 “죽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이 사랑이 나를 통해 빛나게 해야 합니다. 이 사랑만이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1%를 채우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진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통속에서 용서하신 주님, 심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편의 강도를 축복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미움과 중오, 욕심과 어리석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노래합시다. “예수 사랑 나의 사랑 내 맘속에 넘쳐 형제를 사랑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