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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보다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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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보다 연민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당신들 가운데서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나이 많은 이들을 비롯하여 하나하나 떠나가 버리고 예수만 남게 되었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부인, 그들이 어디 있소? 아무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았지요?”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가 “아무도 안했습니다, 주님”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요한 8,8-11)

눈물 많은 남자들

서너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시에 무상급식 문제로 불거진 시장과 교육감의 갈등이 결국 주민투표까지 이어졌고 패배를 자인한 시장이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곧 이어 교육감의 비리 사실이 드러나 검찰에 분주히 드나들더니 결국 험한 꼴까지 보고 말았다. 참으로 흥미 있었던 것은 일의 결과 보다 그 과정이었는데 궁지에 몰린 시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크게 절을 하고 눈물까지 흘린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머릿속에 불현듯 ‘왜 우리나라 남자들은 이렇게 잘 우는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세계 최대의 교회라고 자처하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전 당회장이었던 조용기 목사는 교회와 자기 가족의 진흙탕 싸움으로 온 나라가 소란스러워지자 급기야 설교 시간에 무릎 꿇고 눈물을 훔쳤다. 하기는 군에서 전역할 때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 한다며 울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촛불 집회로 위기에 몰리자 눈물을 보이며 대국민 연설을 했던 이명박 대통령과 잠정은퇴 한다면서 눈물을 쏟아낸 강호동 씨도 있다. 그렇게 예를 들어보니 우리나라 남자들은 퍽 감성이 여린 편이다.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이 북받쳐 오르니 말이다.

성서에서 유난히 눈물이 많았던 인물을 꼽아 보라면 아무래도 구약 시대의 예언자인 예레미아와 이방인의 사도로 널리 알려진 바울로가 아닐까? 그들은 종종 괴로움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는데 자신을 예언자의 길로 내 몬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자기가 개척한 고린토 교회의 배신에 섭섭한 감정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아무튼 누군가 눈물은 흘리는 것을 보면 맘이 짠 해 지면서 괜스레 동정심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어느 여인이 외간 남자와 간음을 저지르다가 현장에서 잡혔다. 이런 경우 달리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율법 적용이 분명했다. 우선 십계명의 제 6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를 어겼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언어쓰임새를 보아하니 유부녀인 게 분명했다(8장 3절의 구나이카는 결혼한 여인을 뜻하는 단어).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간통하면, 곧 어떤 남자가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통한 남녀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10)는 율법규정에 정확히 걸린 것이었다. 그에 더해 율사들은 만에 하나 착오가 있을 세라 적절한 해석까지 내려놓았다.

율사들의 해석인 ‘장로들의 전승’을 모아서 펴낸 책인 <미슈나> 산헤드린(최고회의) 편에 보면 사형에는 돌로 쳐 죽이기, 불태워 죽이기, 목 잘라 죽이기, 목 졸라 죽이기 등 네 종류가 있었고, 그 중에서 돌로 쳐 죽일 죄인은 생모·계모·며느리·남자·짐승·짐승을 데리고 자는 여자와 교접한 자·무당·마술사·안식일 어긴 자·부모를 모욕한 자·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자와 교접한자·엽색가·타락으로 고장을 파괴한 자·요술쟁이·부모를 거역한자 이다. 한마디로 성범죄자인 경우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법이었다.

여인은 절망적이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결혼한 처지에 간통 현장에서 발각되어 사람들에게 끌려왔고 율법해석의 전문가들인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이제 돌에 맞아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존경하는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율법에서 모세는 이런 여자들은 돌로 치라고 우리에게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의 질문엔 예리한 칼이 들어 있었다.

종교지도자들이 고발하는 동안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 썼다고 한다. 과연 무엇을 쓰고 있었을까? 다양한 추측들이 있었는데, 고발인들이 지었을 법한 죄의 목록을 쓰고 있었다(예로니무스),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는 7절의 내용을 미리 땅에 썼다(맨슨), ‘용서한 사람은 하느님이 기억하리라’(예레 17,13)는 구약성서 구절을 쓰고 있었다, ‘악한 이의 행동에 동참하지 말라’(출애 23,1)는 율법조항을 쓰고 있었다(데렛), 예수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있었다, 등등. 독자 여러분도 한번 그럴 듯한 상상을 해보시기 바란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윽고 눈을 들어 말씀한다. “당신들 가운데서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

돌을 던지시오

신명 17,6-7에 보면 최소한 두 명의 남성(!)이 증언을 해야 죄가 성립된다. 그리고 죄가 성립된 경우 바로 그 남성 증인들이 먼저 돌을 들어 죄인을 가격을 해야 한다(신명 17,6-7). 아마 죄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경우나 거짓 증언을 한 경우 차마 돌로 내리치지 못하는 인간의 심성을 방패삼아 마지막 장치를 그렇게 설정한 것 같다. 일종의 심리적 조치라 하겠다. <미슈나>에선 ‘돌로 쳐 죽이기’의 구체적인 과정을 보다 근사하게 만들어놓았다.

먼저 증인 중 한 사람이 돌을 들어 죄인의 등 아래쪽을 강하게 때린다. 죄인이 고통을 참지 못해 등을 펴 가슴을 드러내면 두 번째 돌로 심장 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한다. 그리고 고꾸라진 죄인을 뒤집어보아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면 된다. 하지만 만일 살아있다면 이제 두 번째 증인이 나서서 돌을 들어 심장부분을 다시 한 번 강하게 가격한다. 그래도 여전히 숨이 붙어있다면 그 때는 전 이스라엘이 나서서 죄인이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진다(산헤드린 편 6,4). 틀림없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단 시간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을 텐데 어떤 경우이든 반드시 죄인을 죽여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규정이다. 이 규정을 지키느라 벌어졌을 처참한 상황을 떠올리면 몸이 오싹해진다. 바울로 역시 그렇게 모진 처형을 당했으나 용케도 살아남았다고 한다(2고린 12,15)

다들 알다시피 예수님의 한 마디에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고 고발과 판결의 현장에는 오직 예수님과 여인만 남아있게 된다. 우선 여인에게 베푸신 예수의 용서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용서라고 하면 어느 복음서보다 루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들이 떠오르지만(15,11-32 등) 비유가 아니라 실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용서의 진상眞相을 만날 수 있다. 실제로 간음을 했든, 종교지도자들의 농간이었든, 여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었고 예수의 손에 여인의 목숨이 온전히 달려있었다. 그 때 예수의 한마디로 고발자들이 물러났으며 그들이 물러간 후 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만일 예수님이 다음 질문을 했으면 어땠을까? ‘도대체 어쩌다 그랬습니까?’,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굽니까?’, ‘이러고 다니는 걸 어머니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마 그런 질문을 했다면 여인의 상처 부위에 칼을 집어넣고 한 번 더 비트는 고통을 보탰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나무라지 않고 선선히 보내주어 여인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다. 모르기는 몰라도 여인은 예수에게서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는 감동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용서 법이자 하느님의 사랑 법이다.

연민의 시작

예수님은 어떻게 그 여인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저지른 죄가 너무나 분명하고 그 질이 너무나 흉악해 감히 입에 담기조차 거북하지 아닌가? 하지만 처참하게 내 팽개쳐져 곧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인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차마 그녀의 죄를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처럼 상처받고 초라해진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연민의 정은 그렇게 싹이 튼다.

예수님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나뿐인 아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절규하는 어미를 그저 지나칠 수 없었다. 예수님은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마리아인 열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회당장 야이로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난 아들은 어쨌든 다시 죽었을 테고, 열 중 아홉은 감사의 말조차 없이 제 갈 길로 가버렸고, 야이로는 여전히 제도권 유대교의 회당장 노릇을 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모두들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던가!

어떻게 해서든 정치적인 입지를 다져보려고 주민투표 전날 무릎 꿇었던 남자도 불쌍하고, 선거전에 나서느라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날린 뒤에 조금이라도 건져보려 비굴하게 청을 넣었던 후보자도 불쌍하고, 가족 한 번 지켜보겠다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눈물을 보인 것도 불쌍하다. 어디 그뿐인가? 자기 한 몸 위기에 몰리자 구테타를 일으킨 장군도 불쌍하고 컨테이너로 성을 쌓고 그 뒤에 숨었던 사람도 불쌍하고 영구은퇴보다 잠정은퇴를 선택한 천하장사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알고 보니 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아니, 왜 그 사람들만 불쌍한가? 우리 지척에서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어가는 이웃이 있지 않는가. 불쌍한 북한 동포들 말이다. 왜 그들의 비명은 들어주지 않는가? 왜 이런 저런 핑계로 지원을 미루는가? 정치적 계산보다 우선 죽어가는 사람 목숨부터 살려 놓아야하지 않는가?

간음한 여자를 붙잡아다 돌로 한번 때려 죽여 보겠다며 서슬이 시퍼래 있었던 자들에게서 연민의 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여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그 여자를 보듬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접했을 때 그들의 얼어붙었던 맘은 눈 녹듯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어서 땅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상처받은 영혼이 느껴졌을 것이다. 예수님에게 전염傳染된 연민의 정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연민은 그렇게 시작된다. 예수님의 시선과 말씀에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일 때. 꼭 기억해 두자.

누구도 고문 또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않는다.
(세계인권선언 제 5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