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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연중 17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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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8 (연중 17주)/ 호세1:2-2:1, 골로2:6-15, 루가11:1-13

이렇게 기도하라!

 

 

기도를 알면 신앙의 길이 보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도는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강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 기도 없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기도는 우리가 늘 숨 쉬는 호흡과 같으며, 우리의 믿음에 생명력을 부어주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성경을 보면 기도를 통해 주시는 두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우선 기도를 통해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도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기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통로입니다.

하느님은 기도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때문에 성서 속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이 필요할 때 는 언제나 기도했습니다. 다윗도, 모세도, 한나도, 에스더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가는 길이 힘에 겨워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느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때문에 주님도 아버지의 힘이 필요할 때는 기도하셨습니다. 죽은 나자로를 일으켜 세울 때에도,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느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와 영적교제를 나누십니다.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기도는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때문에 주님도 아버지와 은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늘 기도하셨습니다. 때로는 한 낮에 기도하셨고, 한 밤중에도 기도하기도 하셨고,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할 때도, 십자가를 지실 때도,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임종하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하셨나요.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영적 교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고, 이 교제가 없이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기도가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할까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느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지, 그 분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과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기도의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우선, 늘 기도해야합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 우리가 늘 밥을 먹듯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일용할 영적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귀한 것일수록, 생명과 관계된 것일수록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아십니까? 숨을 단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듯이, 심장이 단 일초라도 멈출 수 없듯이, 생명을 위해 매일 매일 양식을 취해야 하는 것처럼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는 “기도 없이 기독교인이 되려는 것은 호흡 없이 살아가려는 사람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호흡을 멈출 수 없듯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서 기도하는 것일까요?

먼저 참된 기도는 주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기도를 할 때 어디를 향하고 있는 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이 세상적인 기도와의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의 차이입니다. 세상적인 기도는 자신을 향하거나 아니면 어떤 사물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기도는 오직 하느님만을 향해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감사성찬례를 드릴 때 “마음을 드높이 주를 향하여”라고 노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먼저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 지금 나에게 필요한 욕구나 세상적인 어떤 필요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여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고 사람을 의식하거나 세상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위선적인 기도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기도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숨은 것도 다 아시는 하느님을 향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화려한 말이나 화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대 살아 있는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은 다만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우”라고 하는 이 한마디 말로도 기도는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목소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입니다. 이 진실한 마음이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둘째,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최민식 교수의 화보집 서문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병원에 환자 둘이 있었습니다. 마침 한 사람은 불교 신자였고, 또 한사람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불교 신자가 카세트로 불경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귀에 거슬렀던 모양인가 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는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 카세트를 치워주십시오”

그런데 놀랍게도 그만 카세트가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는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제 기도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최민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 기도는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기도일까요?”

기도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혹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쓰는 도구가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하느님을 변화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변화되는 기도입니다. 때문에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링컨 대통령은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부관이 와서 “각하, 주님께서 각하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이 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 나는 의심하지 않네. 다만 내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네.”

 

어떻습니까? 멋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시지. 다만 내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그게 나를 두렵게 한다는 이말, 우리가 기억해야할 마음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때문에 때로는 “나에게 필요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할 양식을 구하라 하시고, 내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기에 앞서 이웃을 먼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만이 모든 것을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고,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확신과 신뢰를 갖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세상의 악한 아비들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것, 좋은 것을 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 고난과 실패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8)

사도 바울은 가시와 같은 고통을 덜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 속에서 응답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병을 그대로 놔 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병이 나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병을 났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병이 났지 않으면 응답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바울로는 자신이 병이 났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하느님은 응답해 주셨다고 확신했습니다.

주님은 이 고통을 통해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정화하시고, 그리고 이 고통을 통해 자신을 더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때문에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울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이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이는 이런 기도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이 어떻게 사자 굴에서 기도할 수 있으며, 다니엘의 친구들이 어떻게 불가마에서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합니다.

다음으로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밤중에 빵을 꾸어달라는 친구에게 우정만으로는 빵을 내어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게 일어 청을 들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귀찮게 졸라 된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정이나 안면이 더 중요한 것이 세상일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귀찮게 졸라대는 인내가 우정이나 안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하느님의 응답을 받기까지 밤을 새워가며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 환도 뼈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만은 일곱 번을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이게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인내가 없는 기도는 그 열매도 없습니다. 인내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자만이 기도의 열매를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도는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눈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하지 않는데 구해질 리가 없고, 찾지 않고는 찾을 수 없으며, 두드리지 않고는 결코 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고 가르쳤습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린 사람들입니다. 솔로몬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기도를 통해 자식이 없어 서러움을 받던 자신의 한을 풀었고, 하박국은 민족이 처한 위기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회개하며 기도함으로 죄를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성서를 보면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를 놓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렸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기도는 하늘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으니 적극적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감동시켜 보좌를 움직인다.”고 성인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기도해야합니다.

누가 해라고 해서가 아니라, 목이 타는 사슴이 물을 찾듯이 갈급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기도하는 사람이 구할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수행자는 기도로써 영혼의 양식을 삼는다. 기도는 인간에 주어진 마지막 자산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필요할 때만 쓰는 그런 대용물이 아닙니다. 기도는 마치 호흡과 같아서 기도는 일상적인 삶이 되야 합니다.

내 자신이 주님 안에 머물기 원하십니까? 그리고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너 내 삶을 이끌어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주님의 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내안에 나는 주님 안에 머무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확신과 신뢰를 갖고 인내하며 기도하십시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그 기도를 통해 일어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