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이제는 나를 톤해 성탄이 되게 해야합니다(성탄 감사성찬례, 최도미닉 신부 말씀)

이제는 나를 톤해 성탄이 되게 해야합니다(성탄 감사성찬례,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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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대미사)/ 이사52:7-10, 히브1:1-4, 요한1:1-14

이제는 나를 통해 성탄이 되게 해야합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교우님과 교우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성탄이 되면 모든 교회들의 하나같이 선언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입니다. 성탄은 평화를 노래하는 날입니다.

저는 요즘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남북관계, 여야의 정쟁, 민영화를 둘러싼 철도 파업을 보면서 지금 같이 주님의 평화가 절실히 요구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어둠 속에서 큰 별을 내시어 마구간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구유에 놓인 아기를 보게 하심으로 우리가 가야할 평화가 무엇인지, 우리가 누려야할 생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행복과 기쁨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우리가 가야할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 축복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는 날입니다.

이사미 이쿠요라는 일본 작가가 쓰고 그린 “알을 품은 여우”라는 그림동화가 있는데 아주 인상적입니다.

어느 날 여우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새알 하나를 발견합니다. 여우는 한 잎에 털어먹으려다가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렇게 알 하나를 홀짝 먹는 것보다는 이 알을 품었다가 알에서 나온 아기 새를 꿀꺽 잡아먹는 것이 더 맛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고는 여우는 나무 아래에 둥지를 만들고는 새들처럼 살며시 알을 품기 시작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움직이지 않고 품고 있다가 드디어 부화가 되어 작은 아기 새가 껍질을 깨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우가 아기 새를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아기 새가 여우더러 “엄마, 엄마”하며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여우라도 이렇게 되니 차마 잡아먹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우는 아기 새를 두고 숲 속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우는 아기 새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아기 새에게 돌아와 아기 새를 키우게 되었고, 아기 새와 여우는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작가는 어떻게 해야 평화로울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이 동화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면 이런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 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젖먹이가 독사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얼마나 기가 막힌 노래입니까?

여우가 어떻게 아기 새와 함께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늑대와 새끼 양이 어울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목표가 바뀌고, 그 목표가 바뀌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우리가 꿈꾸던 평화가 옵니다. 그렇다면 삶의 체질을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첫째, 말씀입니다.

아기 예수는 말씀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보면 말씀이 보입니다. 생명을 주신 말씀, 화해를 주신 말씀, 축복을 주신 말씀이 보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곧 참 빛”이며, 이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곧 예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미천한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를 보면 거기에 생명의 말씀, 평화의 말씀이 보입니다.

 

히브리기자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므로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 앞에 서 보십시오. 그 말씀으로 우리의 잘못된 마음을 도려내야 합니다. 그러면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평화, 내 가정의 평화, 이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성탄은 예수를 바라보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에게로 다가가는 날입니다.

 

우선 바울로는 말씀으로 오신 사건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2:6)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우리의 어둠을 치유하기 위해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왕궁이 아니라 가장 미천한 곳, 인간조차도 살 수 없는 마구간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겸손히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니고는 평화는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성탄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은 섬김을 받아 보셨습니까? 으뜸이 되어 보셨나요.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으뜸이 되려고 할 때, 우리가 섬김을 받으려 할 때 꼴찌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으려하는 그 순간부터 으뜸이 되려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영혼이 병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가 되었던, 교육이 되었던, 아니면 세상의 권력이 되었던 낮은 곳을 향해 갈 수 있을 때만 진실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그렇게 잘 알았던 제사장도 율법학자도 성전을 지어 바쳤던 헤롯도 예수님이 오시기를 그렇게도 기다렸던 예루살렘의 백성들도, 자신을 찾아왔던 여관주인도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구간에서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을 그 빛을 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이방인 동방박사도,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양을 치던 목동들은 보았습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하고, 천하고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왕도 예언자도 제사장도 보지 못한 예수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겸손은 말씀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동방박사와 목동들처럼 낮은 곳을 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의 또 다른 신비는 자기를 주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밥이 되겠다는 선언이십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밥이 될 때 평화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이 밥은 썩어 없어질 밥이 아닙니다.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밥입니다. (요한6:26) 남보다 더 가지려는 밥은 곧 목마르겠지만, 나를 내어주는 밥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탄은 밥이 되신 예수를 보는 날입니다. 참된 밥이 되려면 자기를 주어야 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기 위해 자기를 주듯이, 초가 빛을 내기 위해 자기를 주듯이 밥이 되려면 자기를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탄은 밥이 되는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밥이 되셨듯이 우리도 밥이 되기를 다짐하는 날이 성탄입니다.

여기 생화와 조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화는 죽은 꽃, 생화는 살아 있는 꽃이라고 합니다. 그 차이를 아십니까? 생화는 자신을 줍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화는 자기를 주지 못합니다. 너무 예쁜 자기의 모습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은 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를 줄줄 아는 것입니다. 더 높은 이상을 위해 자기를 포기할 줄 압니다. 그래서 생명이 됩니다. 이처럼 성탄은 자기를 기꺼이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날입니다. 하느님은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심으로 생명과 평화의 길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구유 앞에 서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날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 바로 내가 죽음으로서, 나를 줌으로써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내가 밥이 되는 사랑입니다. 네가 밥이 되는 사랑이 거짓 사랑이라면 내가 밥이 되어주는 사람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뒤바꾸어 버리는 엄청난 일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용서 할 수 있습니다”(1베드4:7) 거짓과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로마12:9)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고, 저주하는 자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으며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어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1요한3:14)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성탄은 오직 삶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성탄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말씀은 책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삶속에 있습니다. 말씀이 삶이 되는 사건, 이게 성탄입니다. 책속에 있는 말씀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말씀이 되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성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성탄은 우리 자신이 성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마구간에 놓여 지기를 원하십니다.

 

성프란시스는 마굿간을 만들어놓고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