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인본주의 창조관의 종말

인본주의 창조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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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 창조관의 종말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그 무너짐이 거대했다.(마태 7,24-27)

멸망의 물

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어마어마한 피해가 있었고 방사능 피해로 서울만큼의 땅이 불모지가 되었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언론이 잠잠한 것을 보니 어느덧 대지진의 공포는 다 지나가고 일본 역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최근에 동경 사는 지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랬더니 일본의 실제 상황은 여전히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가능한 한 외식을 자제하고 꼭 믿음직한 식재료만 슈퍼에서 구해다 먹는다고 하며 슬금슬금 외국으로 도망가는 사람들도 꽤 늘었다고 한다. 게다가 후쿠시마 원전지역의 현 상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언론보도가 통제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일본이 대지진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동방 지역에는 예로부터 자연재해를 물과 연결시켰다. 세상과 인간을 멸망시키는 첫째 이유는 인간들 사이에서 도덕적 의무의 무질서이고 다음 하나는 모든 생물들 사이에 일어난 자연의 무질서이다. 비단 구약성서 외에도 이집트의 <신성한 소의 책>, 메소포타미아의 <지우쑤드라의 홍수 이야기>, 바빌로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일리쉬>에서 발견되는 우주관도 공통점을 가진다.

한 때 이 세상엔 물밖에 없었고 그 물은 끝 간 데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창공이 세워지자 물이 둘로 갈라지며 비로소 가시적인 세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물이 들이닥쳐 맞게 되는 세상의 종말은 태초의 혼돈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세 6,5-7에 보면 하느님이 물로 세상을 쓸어버리고자 작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이는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창조(1-2장), 홍수(6-7장, 특히 6,5-6; 7,11-12), 인간문명의 파괴(11,1-11)와 꼭 닮은 우주관이다. 예수 역시 종말을 내다보면서 물에 의한 심판과 견준 바 있다.(마태 7,24-27)

인간을 위한 창조?

그리스도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창조의 중심에 인간을 두었고 온 우주가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으로 여겼다. 그런 경향은 지구환경에 심각한 위기가 닥쳐 인류가 총체적인 고통을 받기 시작한 20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기준이 되었던 구절은 창세 1,26-30이다.

여기에 보면 모든 창조물 중에 마지막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인간에게 엄청난 축복이 주어진다. 곧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라.”는 것이었다. 이 구절에 따라 인본주의 창조관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을 물려받은 존재로서 자기 이외의 창조물들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하며 이는 모두 세상과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빚어진 일이다. 즉, 창조의 중심에 인간이 서 있는 것이다.

인본주의 창조관이 갖는 최대의 강점이자 약점은 인간을 창조의 중심에 놓은 데 있다. 인간은 다른 어느 창조물보다 훌륭하다. 하지만 인간 자체가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까닭에 세상에 대한 인간의 책임 역시 불안해질 수 있는 노릇이다. 즉, 인간은 얼마든지 잘못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창조 신화의 배경에 접근해보면 전혀 다른 시각도 만나볼 수 있다. 창세 1,1-2,4ㄱ의 창조 이야기는 이른바 사제계 문헌(P)이고 사제계 문헌의 역사의식은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587-538년) 이후 이스라엘 재건의 역사적 사명에 처한 지도층의 의식을 반영한다. 애국적인 견지에서 하느님 신앙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인 창세 2,4ㄴ-25 역시 그 배경이 되는 야휘스트계(J) 신학의 창조관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을 둘러싼 어려운 자연환경(홍수, 가뭄, 지진..)을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깨달아야 할 창조의 메시지를 찾아내려 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인본주의 창조관은 이제까지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그 객관성이 보장될 수 있다.

예수는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 섭리를 읽어냈고 그를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았다. 자연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곳, 즉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절대자의 영역이다. 들꽃이나 새는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저 생긴 대로 살게 내버려두고(마태 6,25-34), 주검은 독수리가 청소하도록 놓아둠이 상책이다(루가 17,37).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고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것은 당연하며(루가 6,43-45), 설혹 밀밭에 가라지가 좀 생겼더라도 부산을 떨 필요는 없다(마태 13,24-30). 인간은 자신의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기에(마태 5,36) 내일을 걱정하지 말 일이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마치 우연처럼 세상에 등장한 인간은 불현듯 인생을 마감한다. 그 많은 곡식을 곳간에 가득 채워둔 채 말이다(루가 12,16-21). 따라서 풍년이 들었다고 호들갑을 떨며 즐거워할 일도 아니다.

인본주의 창조관의 종말

일본의 재해를 보면 자연스럽게 이 년 전에 일어났던 아이티 지진이 떠오른다. 지진의 발생과 일차 피해는 비슷했지만 그 후로 이어진 양상은 전혀 다르기에 그렇다. 즉, 같은 자연재해라 하더라도 인간이 이루어낸 기술 문명의 규모에 따라 그 피해 범위가 예측 불허의 상태로 확대되고 만다. 에너지 혁명으로 인류가 자랑해마지 않았던 원자력 발전이 이제 인류의 목줄을 조르고 있는 형국이다. 인류가 공들여 추구했던 편리한 삶에 주어진 잔인한 대가이다.

창조의 중심에 인간이 서 있다는 식의 인본주의 창조관은 자연에 대한 지배, 즉 권력의 논리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창조의 중심이고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언명 뒤에, 인간에게 그에 부합하는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이 들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니, 한 결음 더 나아가 그 책임에는 인간의 과오를 인정하고 올바른 길을 깨우쳐 나가야 한다는 지상 명령이 담겨있는 것이다. 인본주의 창조관이 갖는 근본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발견된다. 우주 역사에서 생성과 파괴는 언제나 있어왔고, 생성과 파괴가 진행되는 전체 과정은 창조의 하부논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창조의 상부논리인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결코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인본주의 창조관의 해체는 시대의 과제다. 인류는 이제야 겨우 ‘창조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인본주의 창조관의 허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더디게, 아주 미련하게 그리고 아주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 가면서 깨달아가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1979년에 발표된 교황 회칙 중 일부를 읽어보자.

금세기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영역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거창한 진보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피조물이 허무 아래 든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 보이고 있지 않은가? 급속한 공업화 분야에서 빚어지는 자연 환경 오염의 위협이라든가,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과 이와 비슷한 무기의 사용으로 자멸할지 모른다는 전망 등 몇 가지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새 시대를 맞는 세계, 우주여행의 세계, 과학과 기술 공학적으로 일찍이 없었던 성과를 달성한 세계는 동시에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로마 8,22) 세계,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로마 8,19) 세계가 아닐까?
<인간의 구원자> 8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