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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경에서 승리하리라(사순 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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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에제37:1-14, 로마8:6-11, 요한11:1-45

 

인생의 역경에서 승리하라

 

인생은 고통라고 합니다. 늙고 병드니 고통이요,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고통이요, 이별하니 고통이요, 서로 미워하고 싸우니 고통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자로의 이야기는 이런 절망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광야에 새 생명을 주신 것처럼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치유하시고, 새 생명을 주십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한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병이 들면 병든 그 사람만의 아픔이 아닙니다.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도 함께 고통과 아픔을 줍니다. 더군다나 그 병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아픔과 충격은 더 크게 마련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아마 “나자로라”고 쓰지 않고 “사랑하는 이”라고 쓴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고통과 아픔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고통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자로를 죽음에서 건져내심으로 아픔과 고통, 절망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저는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 기적을 통해서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불행과 고통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봅니다.

 

우선 인내하며, 끝까지 믿고 신뢰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로의 병환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지체 없이 달려가실 만도 하신데 이틀을 지체하다가 가셨습니다. 그것도 일부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지체하셨나요. 정말 나자로를 사랑하셨다면 지체 없이 달려가셔야 하지 않나요. 저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종이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이틀이면 족한 거리, 이틀 후면 주님이 오실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종뿐이었습니다. 돌아온 종은 “오빠는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빠는 결국 죽고 만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떤 마음이 생길까요? 제 경험으로 보면 오빠가 죽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실망과 섭섭한 마음은 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섭섭함은 분노로 빠져 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오셔야할 주님은 오시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오빠는 죽었으니 예수님에 대한 신뢰는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심정은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불평하는 투로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곧바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는 달리 왜 오빠는 죽었습니까? 라는 불평이 담겨 있는 말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하더라도 또 주님이 말씀이 현실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예수입니다.

 

욥에게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수천마리의 가축이 약탈당하고 일꾼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식마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마저 심한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때 아내는 욥을 저주합니다. 욥은 자신을 저주하는 아내를 향해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 하여 어찌 거절 할 수 있단 말이요.”

바로 이 한마디, 바로 이 생각이 결국 욥을 구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달라고 매달리던 분, 주시는 분도 그분이시라면 거두어 가시는 분도 그분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때 주님의 손길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을 얻습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 주님에 대한 의심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로처럼 고난입니까? 역경입니까? 죽음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이런 의심을 버리고 주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이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있는 첫 번째 비밀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칫솔을 파는 아저씨가 “자, 손님 제가 무얼 팔려고 나왔을까요? 칫솔입니다. 한 개에 200원씩 다섯 개 묶여 있습니다. 얼마일까요? 네 1000원입니다. 뒷면을 보겠습니다. 영어가 써 있습니다. 메이디인 코리아. 이게 뭘까요? 수출했다는 뜻입니다. 수출이 잘 됐을까요? 폭싹 망했습니다. 자, 그럼 하나씩 돌려보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칫솔을 돌린 후에 아저씨는 말을 이었습니다. “손님, 제가 몇 개나 팔 수 있을까요? 궁금하시죠. 저도 긍금합니다. 잠시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아저씨가 하는 말, “자, 칫솔을 네 개 팔았습니다. 얼마 벌었을까요? 4000원 벌었습니다. 제가 실망했을까요? 네, 실망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포기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포기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칸이 있으니까요..”

또 팔 수 있고, 팔 곳이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포기하는 않는 그 모습이 짠합니다. 우리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자로의 무덤으로 가시기 전에 두 자매에게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자매는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것은 저도 알 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 속에는 나자로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체념이 섞인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지금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다음이 아닙니다. 지금 살리십니다.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주님은 지금 죽어 있는 현실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이 사실을 믿고 주님을 의지한다면 여러분은 삽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두 자매처럼 “예, 주님 믿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몇 개 팔지 못했지만 다음 칸이 있으니 실망하지 않겠다던 아저씨처럼 말입니다.

 

네, 여러분도 이 여인들처럼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과 현실은 언제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은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 무덤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돌을 치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지금 살리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은 현실 앞에서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서 냄새가 납니다.”

 

지금 마르다의 이 말은 믿음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요, 그들의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언제나 나의 경험과 생각이 앞섭니다. 여기서 허물어집니다.

 

실락원을 쓴 존 밀턴은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순간에 작가가 되기 위해 쏟았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작가는 고사하고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 때 그는 불후의 명작인 실락원을 썼다고 합니다. 실낙원을 발표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 비참한 일은 앞을 못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앞 못 보는 환경을 이겨낼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앉는 것이다.”

 

절망과 두려움, 그리고 포기하는 마음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막는 돌입니다. 이것을 굴려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두 번이나 “비통해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나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여 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비통해 하셨고, 또 한 번은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해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번역 성경을 보면 “격앙하시어”라고 번역했고, 개역성경을 보면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통분히 여기신다.”, “격앙하셨다”는 것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씩씩거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민망이 여기다”라는 말은 “답답하고 딱하고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하여튼 주님은 나자로의 죽음을 놓고 격앙하셨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은 나자로의 죽음을 놓고 우는 사람과, 나자로에게 격앙하셨을까? 무엇 때문에 민망히 여기셨을까? 이는 체념에 대한 격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체념하는 사람, 포기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끝가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향해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이것은 결정타입니다. 우리가 불운이라고 생각했던 것,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결정타, 그것은 무덤에서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들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셨습니까?

사람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낮과 밤이 하루이듯이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생명이라는 거대한 사이클 속에서 하나입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극락으로 가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는지를 알면 고통을 이길 수 있고, 극락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죽음이란 뭘까요?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순교하고, 죽임을 당해도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다면 그는 살아 있는 것이요, 그가 살아 있어도 하느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그것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11장 5절의 말씀을 보면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라자로와 그 자매들을 사랑했고, 또 그들도 주님을 사랑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사랑했고, 또 사랑을 받아왔던 나자로가 병이 들었고, 결국 이 병으로 인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자로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병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이 부분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자로의 병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낮에 걸어다는 사람은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나자로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에서 온 죽음입니다. 때문에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느낄 것을 느끼지 못하는 죽음입니다. 모든 죽음은 관계가 깨지는데서 옵니다. 우정도 부부의 사랑도 모두가 관계가 깨지는데서 옵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이 아닙니다. 깨어진 관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치유됩니다. 이 때 회복됩니다. 이 때 승리합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낄 줄 모르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육체에서 영적인 것으로, 이기심과 욕심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죽은 나자로를 살리러 가자”하지 않으시고 “나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깨워야 하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 이제 이 말씀의 결론으로 달려갑니다.

어떻게 우리가 고통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된 삶을 살아가며, 내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주님은 라자로에게 명령했을 뿐입니다. 이 때 나자로는 무덤에서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참된 승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육체의 무덤에서 나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습니까? 그 말씀에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러면 “죽어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사는” 기적이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고난과 역경은 팔자소관도 아니고 운명도 아닙니다. 그것은 딛고 일어서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나자로의 죽음이 오히려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을 채워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난을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고도 남을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또 다른 많은 사람의 아픔을 치유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생의 역경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