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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낮추는 사람(연중 2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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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연중22주일) / 예레2:4-13, 히브13:1-8,15-16, 루가7:14,17-14

자기를 낮추는 사람

 

 

우리가 무엇인가를 담거나 보관하려 할 때는 반드시 그릇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격이란 그릇에 담겨집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필립2:1-11)

바울로는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합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이 되신 그 인격을 닮아 살아갈 수 만 있다면 우리 안에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좋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담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음식도 그릇과 함께 못쓰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우리 자신이 주님처럼 겸손한 인격자가 되야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초청을 받아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만 초청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아는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은 왠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존경 받는 높은 지위에 있을지라도 그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것은 겸손이란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왕이 된 다윗은 무엇보다도 야훼의 궤를 자신의 왕국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짜를 보내어 불레셋에 있는 야훼의 궤를 모셔오게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용포를 입고 3만 정병을 도열시켜 야훼의 궤를 맞이했습니다. 사실 겉으로는 하느님의 궤를 맞이한다고 하였지만 내심은 자신의 위상을 만 천하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야훼의 궤가 나곤의 집을 지날 때 법궤를 끌고 가던 소가 펄쩍 뛰는 바람에 법궤가 마차에서 떨어지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우짜라는 사람이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법궤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떨어지지 않도록 법궤를 잡았던 우짜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하느님의 법궤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당연히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야지요. 그런데 떨어지지 않도록 법궤를 잡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우짜를 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겁이 난 다윗은 야훼의 궤를 모시지 못하고 잠시 오베데돔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법궤를 모신 오베데돔의 집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 때야 법궤를 모시는 자신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능력이 충만한 다윗이 아니라 겸손한 다윗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비로소 왕의 용포를 벗어버리고 베옷으로 짠 에봇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야훼의 궤를 맞이했습니다. 이 때 비로소 하느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이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인격 안에 당신의 모든 것을 담아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이 원하시는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공로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공로의식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부터 교만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왜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을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로의식 안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랑과 우월해야 한다는 열등의식이 함께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윗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윗자리에 앉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미워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을 보십시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정직하지 않는 것, 음탕하지 않는 것,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며 기도하는 것,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거룩한 행위입니까? 그런데 이런 거룩한 행위들이 어디에서 허물어집니까?

“저는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교만에서 허물어집니다. 남과 비교해서 남을 무시하거나 자기를 자랑한다면 결국은 울리는 괭가리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정말 주님처럼 겸손하려면 이런 공로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마음, 그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때문에 남과 비교하여 그를 무시하거나,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만족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퇴박맞고 상처를 입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초대할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을 부르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되갚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무엇인가를 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 하고,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결국은 공로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은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인정받으려 하는 열등감도 그리고 자랑하고 싶은 자기 과시도 버려야 합니다.

 

둘째 겸손은 배려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왜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 할까요? 내 자신은 그 자리에 앉을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윗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이라고 누가 판단했나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게 교만의 특징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먼저 보지만 교만한 사람은 잘못을 남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얼마 전 등산을 갔는데 아주 재미있는 유모어를 들었습니다.

택시운전사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셋이 있답니다.

타자마자 운전수에게 “우리 집으로 갑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

 

그리고 택시 운전사가 “어디로 모실까요?”하고 물으면,

“안 가르쳐 주지” 하고 말하는 사람,

그리고 어디까지 가십니까? 라고 물으면

“알아 맞춰 보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풍자는 배려를 상실한 이 세대를 풍자한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할 때는 그 음식 냄새가 담장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행여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가 남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을 초청할 때”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내가 아는 사람, 나에게 은혜를 준 사람을 초청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초청할 사람은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과 같은 사람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로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아니라 남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을 보면 “학대 받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도 학대받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학대받는 사람과 함께 학대받는 사람의 심정으로 함께 나누며 살 수 있습니까?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내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유행가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안타까웠소 ” 그렇지요. 아내의 손이, 아내의 주름살이 애처러워 보이면 남자가 철들 때라고 합니다. 남편의 처진 어깨를 보면서 남편이 힘들게 살아가는 구나라고 느끼면 아내가 철들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해라는 말은 영어로 언더스텐드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언더” 밑에, “스텐드” 서보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마음을 키워가야합니다. 이게 도입니다. 언더스텐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런 배려하는 마음에서 빛나오고 소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을 비출 수 있고, 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은 사람에게서 받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꼴찌가 되라 하시니 적당히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놀고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꼴찌가 되는 일 쉽습니다. 남일 할 때 놀고, 남이 일어날 때 잠자면 꼴지가되지 말라고 해도 꼴찌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꼴찌가 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되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결과에 연연하거나,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한다면 그 좋던 믿음이 어느 한순간 어물어져 버립니다. 마치 모래위에 세운 집처럼 작은 바람에도 허물어져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 내 생각처럼 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행복합니까? 하느님이 주실 은총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을 바라는 마음,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십자가 위에서도 감사하셨습니다. 기뻐하셨습니다.

모세는 므리바에서 하느님께 질책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리라는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이유는 하느님을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모세를 불러 바위에게 물이 나오라고 명령하여 백성들에게 그 물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의 뜻대로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 물을 내게 했습니다. 이것이 죄였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해서 모진 고생을 하며 백성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는데 큰 잘못도 아니고 말로 해야 할 것을 지팡이로 바위 두 번 쳤다고 그토록 꿈꾸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다니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우리는 가끔 이런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 칭찬을 받기는커녕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정말 성실하게 주님을 믿어왔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해야 하고, 왜 나를 알아주지 않습니까? 정말 주님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십시오. 한마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수고, 공적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모세를 저주해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모세에게 마지막 소명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겸손의 소명입니다. 겸손이 없이는 그 누구도 가나안을 선물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이란 모세처럼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의지대로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결과를 하느님 뜻에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윗자리를 주셨습니까? 스스로 차지하려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선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여보게 저 윗자리에 앉게”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겸손이란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하느님의 뜻을 맡기는 것이요, 그 결과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쓰지만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이 쓰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께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창세12:3)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열매는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불러주신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심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