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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수여자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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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수여자 예수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마르 1,14-15: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자유의 정의

자유를 정의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만일 개인이 무엇이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자유라면 이는 절대왕정 시절에 왕이 누렸던 무소불위의 권력만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과거의 전제군주들은 종종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몇 만 명쯤 희생하는 일 따위는 대수롭게 않게 여겼다. 제 맘대로 전쟁을 일으켜 농부들을 전쟁터에 내보냈다가 정치조건의 변화에 따라 갑자기 평화조약을 맺기도 했다. 군주의 눈에, 졸지에 차출되어 전쟁터에 나온 농부의 죽음은 죽음도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북의 김정일이 언젠가 ‘사람 몇 천 죽는 것쯤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전제군주의 추악한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난다.

그와 반대로 문명사회에서 자유란 그 범위가 점점 더 확장되어 나가는 특징을 갖는다. 전제군주가 절대권력 하에서 누렸던 자유를 모든 인간이 나누어가지려 노력한다는 뜻이다. 그 과정이 물론 쉽지 않았다.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노예의 권익을 밟고 일어선 고대 그리스의 자유민들이 있었고, 중세가 지나면서 ‘자유로운 공기’를 숨 쉬려 도시로 진출한 농노들이 있었고, 자유 평등 박애를 혁명 이념 삼아 왕권을 몰아낸 프랑스 시민이 있고, 진정한 자유와 참된 인권의 회복을 위해서 계급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맑스도 있었다. 이런 역사를 생각해보면 자유란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끈질긴 투쟁을 통해 쟁취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율법의 소유, 문화의 소유

예수가 활동하던 때의 유대 땅에서 자유란 지배층의 몫이었다. 그나마 정복자 로마제국의 위세에 짓눌려있어 반쪽 자유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로마는 광활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갖은 꾀를 다 짜냈다. 그래서 겉으로는 자유를 주는 척했지만 실속을 꼼꼼하게 챙겨가는 정책을 수행했다. 이를테면, 식민지 재정관은 로마인 관리가 맡았지만 세금을 직접 거두는 일은 현지인을 고용해 피지배층의 원성이 모두 동족에게 돌아가게끔 만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리 마태오나 세리장 자케우스는 유대인이었지만 욕을 도맡아 얻어먹는 위치에 있었다. 오죽했으면 예수조차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6)이라는 말을 했을까.

그런 식의 교활한 식민 정책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토후 세력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필요했던 이들이 바로 유대 귀족들이었다. 또한 철저한 야훼 신앙을 갖고 있던 유대인을 관리하려면 종교지도자들을 구워삶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로마와 유대 지배 계층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동반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예수의 죽음을 두고 빌라도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진 것을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로마제국은 사형권을 갖고 있었지만 현지 사정에 따라 사형의 우회적인 허락도 가능했다는 말이다. 마르코복음 15장이나 요한복음 18-19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당시의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의 특성은 수단 방법을 가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가 로마 제국에 유보된 대신 유대인 사회에서 적절하게 힘을 발휘할 여지를 마련해두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율법이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당시의 율법은 계층을 가르는 구실을 담당했고 율법 규정을 글자그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치부되었다. 예수 시대에는 직업상 죄인과 태생 죄인이 있었다. 세리, 목동, 푸줏간 주인(백정), 의사, 고리대금업자, 개똥 수거꾼 등은 천한 직업을 가졌다고 하여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태생 죄인으로는 사생아, 앉은뱅이 같은 병자,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여자가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죄인들은 틀림없이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제풀에 지옥에 떨어지리라는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율법 준수 여부가 계층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필연적으로 율법에서 소외되는 계층이 생기면, 결국 율법이란 지배자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문화의 소유가 지배/피지배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가 여지없이 적용되는 사회였다.

자유의 선포

권력을 거머쥔 자들의 속성 중 하나는 소수小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면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야 그 권력의 양과 질이 월등해진다. 따라서 ‘의인’이 줄면 줄수록, 또한 ‘죄인’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의인의 지위가 상승되기 마련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마태 23,2-7) 그처럼 하느님이 모세에게 손수 만들어주신 구원의 율법이 처량한 신세에 빠져있었다. 율법이 종교지도자들의 위치를 돈독하게 지켜주는 패권주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음에는 놀라운 차원이 들어 있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인 ‘하느님 나라’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회개와 믿음이 절대적인 전제 조건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누구라도 회개만 하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게 된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런 식의 사고는 유대인 사회에서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당시의 기층 종교 세력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계층적으로 해석하는데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율법 규정들의 일점일획까지 철저히 지키는 의인들의 몫이지 결코 죄인의 차지가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유대인/이방인으로 나누어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우월감에 비추어보면 이방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나라가 주어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의 강조점은 ‘회개’에 있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에 있다. 즉, 회개할 수 있는 자격에 구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 나라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개념이기에 가능한 설명이다.

공통의 목표

예수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선사했고 이 자유에 계급타파는 물론, 율법준수라는 까다로운 종교적 조건과 지은 죄에 합당한 비싼 제물을 바쳐야하는 경제적 부담까지 배제되어 있었다. 글자그대로 예수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자유’였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사실 공짜라고 하면 양잿물도 들이킨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구원을 공짜로 얻을 수 있다니! 복음이 갖는 폭발적인 힘을 느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복음을 통해 얻는 무한정의 자유가 불현듯 다가오지는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유’란 결코 쉽게 쟁취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를 선사받는 이들에게는 예수와 함께 걸어야 하는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로는 무한정의 자유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하느님 안에서 얻은 자유는 대단히 소중하고 누구나 향유해 마땅하나 공동체를 위해서 종종 제한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논리다. 푸줏간에서 이방신의 신전에 바친 고기를 사와 나누어먹을 때 강한 심장을 가진 신자는 ‘원래 우리 주님 외에 이방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맘대로 먹어도 됩니다.’라고 했으나 약한 심장을 가진 신자는 무엇인가 꺼림칙해 고기를 사양했다. 그 때 바울로는 한편으로는 강심장 교우를 편들면서, 다른 한 편 약심장 교우를 위해 강심장 교우도 고기를 사양하라는 권고를 한다.

우리는 종종 권리와 의무를 혼동한다. 이를테면, 교우들은 성당 내 주차시설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공항버스로 갈아타고 한 달간 외국에 나가있기 위한 편의시설로 성당 주차장을 이용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법적으로 말해, 내 자신의 이익이 공동체의 균형을 깨는 것이라면 이는 권리가 아니라 이기적 욕심일 뿐이다.

복음은 한 편 자유를 선사하면서 다른 한편 공통의 목표를 지향한다. 복음을 바탕으로 한 공동선이 설정되지 않으면 자유란, 그저 누리기만 할 뿐 가치를 생산해낼 수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복음으로 가는 길에 동참을 요구했고 바울로는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자유를 제한했으며 교회에게는 이기심을 버려야 하는 지상과제가 주어졌다. 이 점을 잘 인식할 때야 비로소 복음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1. 모든 사람은 그 인격의 자유롭고 완전한 발전이 그 사회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나갈 의무를 진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의 정당한 승인 및 존중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의 도덕, 공공질서 및 일반적 복지의 정당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여 법률로써 정해진 제한에만 복종한다.
3.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여 행사할 수 없다.
(세계 인권 선언 제 29조)

복음과 세상이 만나는 흔적은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