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장애가 죄입니까?

[장애인]장애가 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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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죄입니까?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1-3)

자립형 복지!

과거에 비하면 우리나라에도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진 편이다. 장애인 편의 시설과 장치들이 의무규정으로 바뀌었고 장애인 고용도 권장사항이 되어 많은 장애우들이 혜택을 보는 게 사실이다. 바야흐로 선진국 형 장애인 정책이 실현되려는 참이다. 그런데 관심이 높아지면서 덩달아 발생하는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도대체 어느 수준까지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해주어야 하는가? 이다.

독자들 중에는 <사랑을 기적을 낳고>(1962), <포레스트 검프>(1994), <내 이름은 칸>(2010) 등의 영화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주인공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장애를 딛고 일어나 성공을 거둔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가 눈에 띄는 작품들이다. 그들 장애인들은 불굴의 용기와 지치지 않는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 난관을 극복해나가 위대한 인물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다.
정부에서 추구하는 이른바 ‘자립형 복지’라는 것도 그와 비슷한 개념이다. 장애인들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져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데 그쳐야 한다. 만일 일일이 다 챙겨주다 보면 장애인들은 영원히 패배자가 될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복지정책도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데 만족해야 한다. 장애인 올림픽을 보시라. 사실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장애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주님, 믿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저주였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이 세상에 의인과 죄인, 두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 의인이야 당연히 ‘율법’이 지시하는 바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일 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아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죄인의 종류마저 친절하게 구분해 놓았다. 세리, 목동, 푸줏간 주인(백정), 의사, 고리대금업자, 개똥수거꾼은 천한 직업을 가졌다고 하여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가장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으며, 아무리 품위 있는 푸줏간 주인이라도 아말렉 사람의 친구일 뿐이다.”(<미슈나> 키두신 4,14)
다음으로 사생아,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여자는 태생 죄인이었다. 기원 2 세기경에 랍비 여후다는 자신의 고급스런 출신 성분에 감동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유대인은 매일 세 번의 찬양을 드려야 한다.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은 이여, 찬양을 받을지어다. 나를 여자로 창조하지 않으신 이여, 찬양을 받을지어다. 나를 (율법에 대해) 미개인으로 만들지 않으신 이여, 찬양을 받을지어다.”(<토세프타> 7,18) 장애인은 후자의 죄인 범주에 들어갔다. 태생 장애인이든,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든 죄인이었던 것이다. 장애인에게 예외란 없다.
요한 9,1-12은 예수님이 소경을 고친 이야기로 이른바 ‘치유기적 사화’이다. 우선 치유 기적 사화가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종종 기적을 베풀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 사화들은 비록 초자연 현상을 이야기로 꾸몄다는 점은 같지만 기적 종류들은 여럿이다. ① 병 고침을 다룬 치유기적 사화, ② 귀신을 내쫒는 구마기적 사화, ③ 자연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자연기적 사화, ④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음식기적 사화 등이 있다. ⑤ 죽은 이를 살리는 소생 기적사화 ⑥ 시련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는 구원 기적사화 등이 있다. 특히, 요한 9,1-12절은 다양한 기적사화들 중에서도 ‘치유기적 사화’에 속한다.
어느 날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난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의 죄 때문에 장님이 되었는지 물어보는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병이란 죄에서 유발되기 때문이다(마르 2,1-12; 요한 5,14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병이 죄의 결과’라는 전통적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이 장차 행할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그가 소경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소경은 오직 예수님에게 치유받기 위해 한평생 어두운 세상에서 살았던 셈이다. 가치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후 이제 유다인들 소경을 불러다 놓고 따져 묻는다(9,13-41). 문제는 예수님이 기적을 안식일에 베풀었다는 점이었다(16절). 유대인들의 안식일 법에 따르면 갖가지 노동을 금지시켜 놓고 있었다(<미슈나> 삽바트 편). 그런데 예수님이 치료를 했으니 안식일 법을 어긴 셈이고, 안식일 법을 어겼으니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사람일 리가 없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죄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25절)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소경은 쫓겨났고, 예수님은 그를 부드럽게 맞아준다. 그러자 소경은 이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주님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한다.  

장애는 죄가 아니다

이 기적사화에서 현대인의 눈에 이상한 곳은 자신의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 궁금해 했던 제자들의 질문이다. 소경을 두고,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가 누구 죄 때문인지 묻는 게 어딘지 어색해 보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란 율법이 내놓고 정해놓은 죄인임이 분명한데, 저 자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으니 도대체 언제 죄를 지을 틈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혹시 그의 부모가 지은 죄를 걸머진 것은 아닐까? 마치 불교 가르침 중 하나인 업보業報를 대하는듯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물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그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거기에서 모종의 규칙을 찾으려 한다. 가령 한국의 어느 가정에 뇌성마비 아들이 있다고 쳐보자. 그러면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왜 이런 불행이 나에게 닥쳤을까? 혹시, 아들을 바라는 마음에서 예전에 딸아기를 뱃속에서 지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이해 벌은 받은 게 아닐까? 그러니 모든 것이 내 죄이다. 하지만 저 아이가 다른 가족에게 방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네 동생은 병신이라며?’하고 놀려대면 어쩌겠는가. 그래서야 다른 아들이 어디 장가나 제대로 가겠는가.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철저히 숨기고 격리시켜야 한다. 어머니는 장애인 아들에게서 그런 설명과 규칙을 찾아내고 만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제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3절) 예수님의 입장은 앞에서 예로든 한국의 어느 어머니와 많이 다르다. 길거리에 나앉은 소경이 장애인인 이유는 그를 통해 하느님이 일을 하기 위함이다. 이는 장애인을 보호하라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배워야 한다는 뜻이 된다. 헬렌 켈러 여사와 스티븐 호킹 박사는 그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자립형 복지?

2003년에 개봉했던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젊은 감독 여섯이 인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 가지씩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영화로, 흔히 옴니버스(omnibus) 형식의 영화로 불린다. 그 중의 하나가 어느 뇌성마비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 장애인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를 횡단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그가 차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네거리는 혼란에 빠졌고 경찰이 서둘러 달려와 그를 구출(?)했다. 그 장애인에게 광화문 네거리의 횡단은 ‘대륙횡단'(여균동 감독, 14분)에나 버금가는 어려운 일이었다. 필자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주목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던 까닭이다.  
장애인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깨달아 스스로 자립의 의지를 다져나가는 노력을 비난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장려할 일이다. 하지만 일선 장애인시설에 근무하는 이들에게는 꿈과 같은 말이다. 다운증후군에 걸린 승재는 아무리 집중을 해도 하루에 고작 10개 정도의 봉투를 만들 수 있다. 행동발달 장애를 가진 훈이는 아무리 야단을 쳐도 동네로 나가 아무 집 물건이든 센터로 가져와 곤란한 일을 일으킨다. 자폐증에 시달리는 민호는 수시로 거리에서 소변을 보고 일전에는 어린이집 앞에서 자위행위를 해 집단 민원까지 들어오게 만들었다.(모두 가명입니다)
도대체 무슨 방업을 동원해야 승재와 훈이와 민호의 자립심을 키워주어 사회의 귀감이 되게 만들 것인가?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사는 장애인센터 ‘함께 사는 세상’의 원장인 박태식 신부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만 간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장애인 센터가 혐오시설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복지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분들이 직접 시설이 나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장애인 친구들과 같이 살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자립형 복지’가 과연 우리나라 복지 정책의 대안代案 인지, 그리고 자립형 복지라는 허울 뒤에는 예산절감이라는 목적이 숨어있지나 않은지…….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 및 국제적 협력에 의해 또한 각국의 조직 및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과 자신의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에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세계 인권선언 제 2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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