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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연중 33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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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신비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농부가 이름 봄에 씨를 뿌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끝을 알고 그 끝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 끝이 주는 영광을 알기 때문입니다. 농부에게 시련이 없겠습니까? 때로는 가뭄이 오고, 홍수가 집니다. 심었던 작물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를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줍니다.

 

그런데 왜 이런 위험과 어려움이 있는데 씨를 심고 밭을 가는 수고를 할까요? 그것은 끝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 주는 영광을 알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단을 안고 기뻐하리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단을 안고 기뻐하는 이 영광을 위해 농부는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끝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우리가 차지할 영광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신앙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비밀을 아십니까? 그것은 장자의 축복이요, 아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아버지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물려줍니다. 하늘 나라는 아들만이 물려받습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물려줄 축복이 뭘까요? 바로 아브라함의 축복과 야곱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 세상에서 누릴 축복이라면 야곱의 축복은 내세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을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은 우리의 삶을 백배나 축복해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고, 치유하시고, 강건케 해주십니다. 이 축복을 광야에서 그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를 갈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바위를 쳐서 물을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게 해주셨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내세의 영광을 약속해 주십니다. 야곱에게는 하늘로 오를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화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하셨습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똑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현세에서 … 축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10:30)

이 축복은 부자청년도, 부자도, 이 세상 어떤 권세로도 받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오직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이요, 거지 나자로가 누린 영광, 영광이요 자케오가 누린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끝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가 받을 그 영광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족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서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 악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하루하루는 지나가는 그림자 한번 죽으면 되돌아올 수 없다. 죽음이라는 도장이 한번 찍히면 아무도 되돌아올 수 없다.”

 

죽음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때문에 이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은 3장 16절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라고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생각하며 삽니까?

“그러니 어서 와서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자. 늙기 전에 세상 물건을 실컷 쓰자.” 라고 합니다. 그저 지금 먹고 즐기는 것이 전부인줄 압니다. 세상 권세, 명예를 누리는 것이 삶의 목표로 알고 살아갑니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라고 말하며 세상 쾌락을 쫓아 살아갑니다. 이것을 바울로는 세상 풍조라고 말합니다. 바울로는 바로 이 세상풍조 때문에 믿음의 형제들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던 것처럼 그렇게 될까 두려워 했습니다.

 

“가난한 의인을 골탕 먹인들 어떻겠느냐? 과부라고 특별히 동정할 것도 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 해서 존경할 것도 없다. 약한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을 정의의 척도로 삼자.”(지혜2:10-11)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은 죽음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잠언 12장 14절을 보면 솔로몬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남몰래 한 일가지도 사람이 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는 심판에 붙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에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종말은 영광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축복의 시간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시간입니다. 잃어버린 낙원이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바로 이 영광을 위해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자신의 재능도 시간도 재물도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 22장 12절 말씀입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사람들은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상을 받는 날입니다.

 

우리가 늘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찬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립니까? 그분이 오시면 우리가 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옵소서.”라고 찬양하며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면 살아가는 것, 이것을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이런 확신이 없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남들 놀 때 놀지 못하고, 남들 쓸 때 쓰지 못하고, 괜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지겠다고 봉사하고, 나누며 허덕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하느님의 보좌에 앉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값진 선물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합니다.

영광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사람은 마지막 때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 힘든 공부를 합니까? 그 영광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차지할 영광을 아십니까? 그 영광을 사모하십니까? 요한 묵시록 21장 11절 말씀입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온통 맑은 수정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환상을 통해서 우리가 차지하게 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고, 이보다 더 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차지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도성을 차지합니까?

어떤 사람이 추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까? 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땅에서 열심히 심고 열심히 가꾸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느님은 천국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이 교회를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핏 값을 치르고 이 교회를 세워주셨겠습니까? 이 교회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표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한 확신이 하나 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서는 천국으로 가는 차표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인들이 어떻게 성령을 체험했습니까? 교회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불교는 교회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아닙니다. 이 교회가 없이는 우리는 구원으로 인도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성전은 하느님의 눈이 있는 곳이요, 마음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예배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존재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비로소 율법을 넘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0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가 본받아야할 믿음의 본질을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쫓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그저 교회를 왔다 갔다는 하는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치고, 아무리 성전을 찾아와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제물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프란스시의 기도를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전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어떻게 해야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나요.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자신을 온전히 줄 때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성전이요, 우리의 삶이 성전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밭을, 우리의 삶의 밭은 하느님의 성전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게 은혜요, 이게 믿음입니다.

 

그리고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려면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상의 종말이 가까우면 나타날 여러가지 징조와 상황에 대하여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날이 가까우면 전쟁, 기근, 지진, 전염병 등 각종 재난이 닥치고, 박해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미움도 생기고 갈등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을 위해 거쳐야만 하는 시험입니다. 금이 용광로에 들어가 정제되듯이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입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르13:22) 이것은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강한 유혹이 어떤 것일까요? 바로 나와 세상풍조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위해 나를 버릴 수 있을까요? 바울로처럼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 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종말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제도, 내일도 아니라 오늘을 살아갑니다.

구원의 때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입니다. 스피노자처럼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해야 할 때도 내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용서할 때도, 회개할 때도 지금입니다. 하느님께 예배할 때도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잃는다면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현재가 없는 과거란 무의미할 뿐입니다. 미래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없다면 그 미래는 허망한 것입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우리가 차지할 영광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과거에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보며, 미래의 희망을 가슴에 담고 지금, 오늘, 주님이 가르쳐주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에게 준비된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는 것,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