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지금은 하느님의 뜻을 물을 때입니다.(부활 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지금은 하느님의 뜻을 물을 때입니다.(부활 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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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주 (사도7:55-60, 1베드2:2-10, 요한14:1-14 )

지금은 하느님의 뜻을 물을 때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중대한 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 것 같습니다. 때문에 세월호 참사 이후 각계각층에서는 하늘 뜻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해왔던 나라를 근본부터 뒤바꾸는 대개조를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 선언이 공약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15일자 경향신문에 기재한 이필상 교수님의 “패자 없는 교육을 위하여”란 글을 보면서 우리 교육도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승자 독식 교육으로 일그러졌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육의 대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험 성적으로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에 의해서 승자를 만들고, 그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소외감을 갖고 평생을 살게 하는 그런 교육은 개혁되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1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리는 그런 교육을 자랑했습니다. 그런 리더쉽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런 환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저는 만 명이 만 명을 서로 먹일 수 있는 그런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야 말로 하늘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열어야할 교회가 침묵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하느님을 뜻을 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가 한국 교회에 요청하고 있는 물음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있는데 정작 교회는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뜻을 알 수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를 보았으면 하느님을 본 것이다.”(요한14:9)

저는 바로 이 말씀 속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길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나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옷만 입었다고 사제가 아니라는 어느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과연 이 세상 사람들이 오늘 한국의 교회, 지금 우리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말하는 교리, 성경말씀을 듣고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교인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교회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느님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교리 모릅니다. 성경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향기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불행하게도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보며 개독교라고 말합니다. 아주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것은 교회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신자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선교초기에 한국 기독교는 고작해야 1000명중 한명 꼴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교회도 없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사회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지금 교회의 위기는 뜻을 묻지 않고, 뜻을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소위 구원파라고 말하는 복음침례교회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뉴스에서 유병언 씨가 설교하는 내용을 들어 보셨습니까? 저는 그 설교에서 이단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단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이단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속에서 예수의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 교회들이 구원파 교인들을 향해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꽃자리 출판사 대표인 한종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는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물질적 성공을 신앙적 척도로 삼는 자세를 보여 왔다.”고 말하면서 한국 종교의 세속화를 질타했습니다. 사실 구원파 교인들만 탓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야 말로 교회의 본질을 예수에게서 찾아야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또 분명한 지표가 보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금 교회 안에 권세만 있고, 예수는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교회마저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힘을 가지려 합니다. 그게 축복이고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상상하십니까? 50만이 모이는 교회, 3천억을 들여서 세운 교회를 원하십니까? 아마 이런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면 주님은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예수살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은 하시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적어도 성공회만은, 우리 강동 교회만은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그 인격 속에서 빛나고 있는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우리가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셨나요.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대분의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모습을 보고는 “이 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시다”라고 말하면서 예수께 매달리며 왕이 되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껍데기였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리고 자기가 먹어야할 양식을 기꺼이 포기한 어린아이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아주 작은 사람들, 12명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오늘 이 교회를 만들어낸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힘이 아니라 남보다 더 강한 힘에서 전능함을 찾으려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황소를 만들어 야훼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처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에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힘과 부가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사실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 나왔지만, 마음속에는 에집트의 황소가 부러웠을 것입니다.

에집트에서 황소는 돈을 만드는 힘입니다. 그리고 황소에게서 먹을 것, 입을 것들 나옵니다. 이처럼 황소는 풍요의 상징이요, 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전해주려던 사랑의 계명이 아니라 에집트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줄 황소를 추앙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슈퍼맨을 본 기억이 납니다. 과학을 초월한 능력으로 불의를 제압하는 모습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세월호의 안타까움을 보면서 슈퍼맨이 배를 통째로 들어올려 아이들을 살려냈으면 얼마나 좋을까? 뽀빠이 하고 외치면 시금치를 먹고 짱 나타나서 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세월호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런 생각들이 이런 비극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면서 내 자신도 놀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힘을 이런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슈퍼멘과 같은 능력과 힘을 보겠다고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에게서 우리가 보아야할 영원히 살게 하며 썩지 않게 할 양식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서 보아야할 예수는 어떤 분인가요?

 

우리가 보아야할 예수님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만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얼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앙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 놓았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렇지요. 자기를 생명의 속죄의 제물로 내 놓게 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남을 죽여서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 했던 그 십자가를 버리고 남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죽는 십자가를 지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내 행복을 보기에 앞서 남의 행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이익을 보기에 앞서 남의 이익을 도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편안함에 앞서 남의 편안함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아픔을 보기에 앞서 남의 아픔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보아야할 예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도망친 선원들 말고, 승객을 살 리가 위해 무전기를 손에 쥔채 죽어간 세월호의 양대홍 사무장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가 보아야할 예수입니다.

예수를 보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남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죽는 십자가입니다. 바로 이 모습 속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에게서 보아할 전능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로 상처가 있는 곳에 치유를” 그런데 이런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자기를 온전히 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때문에 바울로는 말합니다.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필립2:1-2)

 

그렇습니다. 세상의 권세, 지식, 힘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찢어서 우리가 먹을 양식으로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 우리가 찾아야할 보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꿈꾸며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