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진품제자, 작퉁제자(연중 23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진품제자, 작퉁제자(연중 23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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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8 (연중23주) /신명30:15-20, 필레1:1-21, 루가14:25-33

진품제자, 짝퉁제자

 

요즘 짝퉁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짝퉁은 모양은 같은데 내용이 다를 때 쓰는 말입니다. 요즘 중국에서는 계란까지 짝퉁을 만든다는 말에 놀랐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짝퉁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출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 만 원짜리 화폐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짝퉁이고 하나는 진짜 돈입니다. 모양은 똑 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다른가요. 출신이 다릅니다. 하나는 그 출신이 한국은행인데 짝퉁은 복시기입니다. 이처럼 한국은행이 아닌 것은 아무리 모양이 같아도 짝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지요. 짝퉁은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모를 때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실을 알게 되면 그 능력은 사라지고 오히려 종이쪽지보다 못하게 됩니다. 차라리 종이라면 죄는 짓지 않지요. 그런데 짝퉁을 갖고 진짜인 것처럼 쓰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정말 진품과 짝퉁을 갖다놓고 찾으라면 그것을 찾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찾아내야합니다. 왜냐하면 짝퉁을 썼다가는 낭패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일 같은데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짝퉁과 진짜를 분별하는 법이 있습니다. 짝퉁으로는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 진품에는 있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를 보니까 도저히 위조할 수 없도록 한 장치가 있습니다.

불에 비추어 보면 감추어진 세종대왕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이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지도도 보이고 아라비아 숫자로 만이란 숫자도 비치는 은딱지가 있는데 이것도 위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저히 짝퉁신앙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진짜와 가짜가 판별될까요? 헌금을 열심히 하고, 봉사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 진품신자일까요? 아마 그렇다면 주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인 진품과 짝퉁을 구별하기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짝퉁 신앙은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때문에 정말 생명을 선택해야할 자리에서 그것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라 내 생각, 내 철학, 내 주관, 내 경험, 내 고집을 가지고 선택하거든요. 이게 짝퉁신앙의 특징입니다. 때문이 이런 믿음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이처럼 출신이 다르지요.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능력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짝퉁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하고,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결코 진품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나 형제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근본입니다. 부모나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성경만큼 부모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10계명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적용되는 계명 중의 계명, 제1계명은 바로 부모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미워하고 증오해야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내가 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듯이 그렇게 나를 버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내 경험, 내 생각, 내 삶속에 배어진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망대를 짓다가 포기하게 될까요? 아무리 망대를 짓고 싶어도, 아무리 사탄과 싸워 이기고 싶어도 안 됩니다. 왜 안 될까요? 자기를 버리고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짝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런 짝퉁신앙으로는 절대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부모, 내 형제 자매, 나라고 하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진짜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빌레몬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울과 오네시모 그리고 빌레몬이야말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진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선택할 수 있었고, 영원한 나라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요, 복음을 전하는 진짜 제자, 능력과 힘이 넘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했고, 용기를 주었고, 기쁨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먼저 바울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 때 오네시모란 한 노예가 잡혀 들어왔습니다. 바울로는 이곳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이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바울로가 무엇 때문에 감옥에 왔나요.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결론은 감옥입니다. 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이런 아픔을 주시나요.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

그런데 놀랍지요. 바울로는 감옥에 갇혔다고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감옥에서 무엇을 했나요. 찬양을 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전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자신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도 대가도 버렸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주실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였습니다. 때문에 감옥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고, 전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습니다.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망대 짓기를 포기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끝내 망대를 완성했습니다. 때문에 오네시모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울처럼 살고 있습니까? 망대를 지으려 하다가 상황이 어려워지고 힘이 드니까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진짜 제자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망대 짓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빌레몬서를 보면서 더 놀라운 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바울의 제자가 된 오네시모는 바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서슴지 않고 “내 믿음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을 보낼 때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심장을 떼어 보내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저라면 곁에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를 내 곁에 두어 그대를 대신해서 내 시중을 들게 하려고도 나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마음은 저나 여러분이나 바울로나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바울로는 위대한 사도니까 이런 마음이 없겠지.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똑같습니다. 어디서 다를까요? 자기를 포기하는데서 달라집니다.

곁에 두고 싶지만 바울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 때문인가요. 바로 오네시모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바울로는 자신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노예가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빌레몬의 용서, 화해가 필요했습니다. 비록 하느님과의 화해는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주인 이었던 빌레몬과의 화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또 오네시모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절대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필요했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언제나 모든 일을 주님의 뜻에 맞추었습니다. 이게 진짜 제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나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까? 세상에 초점을 맞추었습니까? 이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십자가의 진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불만을 품은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에게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오네시모는 바울로는 만나 회개하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로는 편지를 써주며 빌레몬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죽으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저 같았으면 아마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님, 다른 다 좋은데 거기에 가라는 것만은 강요하지 말아 주십시오. 때가 되면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갈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오네시모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바울로가 써준 편지 한통을 들고 빌레몬을 향해 갑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만약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을 무시하고 오네시모를 체포한다면 그는 도망쳤던 다른 노예들처럼 십자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갔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했을까요? 자기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갖고 있었던 편견, 경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경험, 내 감정, 내 의지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갔습니다. 비록 그 길이 죽음의 길이 될지 모르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빌레몬에게 갔습니다. 이런 용기와 지혜는 오직 한 사람,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이라면 자기를 버리고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게 참 제자가 가야할 참된 삶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빌레몬의 모습입니다.

어느 날 자신으로부터 도망갔던 오네시모가 바울의 편지를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 자신에게 도망쳤던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그보다 더한 바울과 같이 주님의 일을 하는 주님의 종으로 받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와 또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로만이 아니라 빌레몬에게도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빌레몬이 자신을 버리지 못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지나 쓸모 있는 사람이지 나는 아니요. 나는 저놈을 죽여야 해. 나를 배신한 놈이야. 내가 어떻게 저런 놈을 용서하고 저런 놈하고 일을 한단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이 편지는 참으로 빌레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부탁이었습니다. 빌레몬은 귀족입니다. 로마법을 지켜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노예를 섬기라니요, 그냥 노예로 받아달라고 해도 힘든 판인데 바울로와 같은 사람으로 여겨달라니요.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바울로의 편지에는 빌레몬의 자존심도 명예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울의 부탁이 얼마나 무모한 부탁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우리 같으면 이런 부탁을 받고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데 빌레몬은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와 함께 골로사이 교회를 섬겼던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빌레몬서는 신약성경 중에 한 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빌레몬이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는 망대를 졌고, 사탄과 싸워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고 자기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짝퉁제자가 아니라 진품 제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생명과 축복, 저주와 죽음의 길이 놓여 질 때 생명과 축복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과 오네시모 그리고 빌립보는 자신을 버림으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지배하려 공격해오는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 갔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지혜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짝퉁 제자가 아니라 참 제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병든 자를 고쳐주고, 진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그런데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나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