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차고 넘치는 구원

차고 넘치는 구원

796
0
공유

차고 넘치는 구원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마르 7,27-30: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

독일 유학시절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후반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개를 집안에 키우는 일이 낯선 편이었다. 그런데 친구 집에 들어서자 거대한 도베르만 두 마리가 손님을 맞이했는데, 이놈들이 책상과 소파 등 온갖 가구를 뛰어넘어 나에게 달려들었다. 제 딴엔 주인의 친구를 반기는 의욕 넘치는 행동이었겠지만 나로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공포로 다가왔다. 문제는 놈들에게 한 번이라도 관심을 주면 안 되는 데 있었다. 만일 그리하면 염체 없이 내게 몸을 부비고 그 긴 혀로 사람을 핥아댈 게 분명한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피라미드 벽화의 자칼처럼 나의 양쪽에 앉아 따뜻한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며 헉헉대고 있는 놈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오랜 시간을 그 자세로 버텼던 것 같다.

바로 그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의 아내가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외치자 거대한 도베르만 두 마리는 쏜살처럼 식탁으로 달려갔고 친구의 어린 아들 옆에 쭈그리고 앉는 게 아닌가! 만일 이 장면에서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는 성서학을 공부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어른들은 밥 한 톨이라도 알뜰하게 먹지만 아이들은 서툰 숟가락질 때문에 종종 음식물을 바닥에 흘리고, 오랫동안 관찰을 거쳐 이를 간파한 개는 무엇인가 주워 먹으려 아이들의 옆에 자리 잡는 것이다.

마르코복음에 예수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쳐준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7,24-30). 어느 날 예수는 티로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분은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길 원치 않아 은밀히 숨어 있으려 했으나 사람들이 용케도 알고 찾아온다. 그 중 하나인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이 특히 예수에게 다가와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예수는 그 여인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끈질긴 여인의 통사정을 듣고 나서 여인의 딸을 고쳐주었다는 이야기다.

자녀와 개

예수가 가서 머물렀던 티로는 시돈과 짝을 지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곳으로(마르 3,8;7,31;마태 15,21;루가 6,17) 유다 땅에서 지중해 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도시이다. 또한 티로는 로마의 직할 속주인 시리아의 페니키아 지방(시로페니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였다. 비록 여기에 유다인들이 많이 살아 이른바 ‘유다화된 땅’이기는 했지만, 당시에 이스라엘을 갈릴래아/사마리아/유다로 삼등분 했던 지리 구분에 따르면 분명 이방인의 땅이었다. 마르코복음에서 여인을 ‘헬라 여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범 헬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유다인과 구별하여 일컬어지는 명칭이다. 즉, 여인은 페니키아 지방에서 태어난 이방 여인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나눈 대화를 들여다보면 ‘자녀’와 ‘개’라는 낱말을 두고 마치 말싸움을 벌이는 인상을 받는다. 이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 ‘자녀’와 ‘개’가 한몫 단단히 하리라는 훌륭한 암시다. 예수 당시 유다인들에게 ‘자녀’와 ‘개’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전통적으로 유다인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부모자식 관계로 묘사한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몸 바친 거룩한 민족이며 하느님은 만백성 가운데 유독 이스라엘을 골라 자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은 바 있다(출애굽 사건). 하지만 이스라엘은 천성이 망나니라 “자신을 낳은 반석을 버리고 자신을 낳느라 고생한 하느님을 잊고서”(신명 32,18), “삐뚤어지고 비꼬인 세대가 되고 말았다”(신명 32,5). 그래도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라 불렀으며, 이스라엘이 멀리 떠났다면 “아무리 먼 데서더라도 나의 아들들을 데려 오너라, 땅 끝에서라도 나의 딸들을 데려 오너라”고 명령을 내린다(이사 43,4-6). 사실 이 정도면 자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개’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낱말이다. 구약성서와 고대 동방에서 ‘개’라는 존재는 자기의 배설물 속에서 뒹구는 돼지와 더불어 천하고 뻔뻔하며 불행한 창조물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여겨졌다. 사람이 개와 견주어질 때는 극도로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였다. 필리스틴의 장수 골리앗은 돌팔매 끈과 막대기를 들고 나온 다윗 소년을 보고 기가 막혀서 “막대기는 왜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개란 말이냐?”고 했으며(1사무 17,43), 이스라엘의 그릇된 지도자들을 두고 이사야 예언자는 “집 지킨다는 개들은 모두 짖지도 못하는 벙어리”라고 호된 비난을 퍼부었다(이사 56,10). 개란 길에 떨어진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로에서 성행위를 일삼으며, 하느님의 벌을 받아 죽은 시체를 뜯어먹는다(1열왕 14,11;16,4;21,24). 그리고 무엇보다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이 개에 견주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2열왕 8,13;욥기 30,1).

사실 개란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불결함과 천박함을 안고 다니는 존재로 취급받으며, 설령 도움이 된다고 하여도 도둑을 막아보려는 목적 정도다. 먼 데 갈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의 욕설 중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개’가 아닌가?

여인의 용기

놀라운 분 예수가 티로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인은 애 타는 모정으로 찾아와 발 앞에 엎드린다. “너그러우신 분 예수여! 저의 딸을 제발 살려 주세요. 그 어린것이 귀신에 들려 곧 죽게 생겼습니다. 제 맘이 갈가리 찢어집니다.” 하지만 간절히 매달리는 여인에게 돌아온 예수의 말씀은 매정하기 짝이 없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아무리 은유라지만 여인은 졸지에 개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런 모욕적인 말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여염집 아낙네, 그것도 자식을 위해 안절부절못하며 매달리는 불쌍한 여인을 개 취급하다니. 과연 예수의 진심에서 나온 말일까?

예수가 여인에게 한 말씀은 다시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인 유다인이 구원의 우선권을 가지고 있으니만치 이방인 개에게는 기적 능력을 베풀지 않겠다는 뜻으로 예수 당시 유다인들의 선민選民 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렇게 찬 기운이 설설 감도는 예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개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라고 재차 구원을 간청한다. (예나 이제나 개는 매한가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가 여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녀의 딸을 고쳐주었다. 유다인에게만 주어진다고 간주되었던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펼쳐진 것이다.

예수의 한마디 말씀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말씀에 이르기까지 여인이 보여준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인은 스스로 ‘개’임을 자처한다. 아무리 집안에서 같이 길러진다고 하더라도 자녀와 개는 결코 어울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다인과 이방인은 긍정과 부정의 극단에 서 있어서 이방인은 하느님의 구원을 도저히 받을 수 없다. 여인은 ‘개’를 그저 하나의 욕지거리 정도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그 의미까지 충분히 인식했고 자신을 바닥까지 내려 보내는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최악의 모욕을 수긍한 셈이다. 이제 상황이 급변해, 예수의 말 한마디로 두터운 장벽이 무너지고 천대받던 이방인 ‘개’가 바야흐로 구원의 테두리 안에 편입되었다. 개는 더 이상 옛날의 ‘개’가 아니며 이스라엘이 모든 구원에 앞선다는 대전제도 깨지고 만다.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먹어야 하는 구차스러운 행동이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하며 개도 자녀의 대열에 떳떳이 끼어드는, 말하자면 가치의 전도가 이루어진 셈이다. 식사자리에 불청객으로 뛰어들고, 예수의 끔찍한 모욕을 감내하며 오히려 그분에게 간청한 불굴의 용기가 세상을 바꾼 것이었다.

넘치는 축복

뉴질랜드의 원주민이나 폴리네시아의 원시부족이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게는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교환개념이 있다고 한다. 각각 ‘하우’, ‘쿨라’, ‘포틀래치’라 불리는 이 개념은 ‘교환-증여’라는 범위에서 성립되는데, 이를테면 아주 평범한 물물교환을 할 때도 후하게 돌려주는 것(증여)을 도적적인 의무로 삼는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매매체계와 퍽 다른 형태로, ‘되로 퍼주면 말로 받을 것’이라는 속담과 “작은 형제라도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게 하는 이는 하늘에서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기서 ‘증여론’ 연구로 유명한 M. 모스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하겠다: 성실한 경제활동과 근면한 삶을 통해 잉여剩餘를 산출한 인류의 일부는 오늘날 문명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의 교환을 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환으로 예증되는 물질적, 정신적 생활이 비타산적이며 동시에 의무적인 형태로 이루어질 때 교환되는 물건과 교환하는 사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교환에는 확고한 영적 교류와 제휴관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는 재화의 순환이 권리의 순환이자 사람의 순환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런 제도는 역사의 매우 오랜 변천과정 동안 인류 대다수의 제도였음이 틀림없고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 교환-증여의 원리는 아직 개인적인 계약, 돈이 오가는 시장, 판매를 가능하게 만드는 화폐개념에 도달하지 못한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원칙이었다.

예수의 자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인은 절망의 끝에서 예수에게 매달렸다. 스스로 개가 된 것이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선물을 주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여인이 받은 후한 선물은 분명 다른 이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아직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싹을 틔우지도 못한, 오래 전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