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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감사,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연중 28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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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13 (연중 28주)/ 열왕하5:1-3,7-15, 2디모2:8-15, 루가17:11-19

 

                  참된 감사,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미사를 드립니다. 희랍어로 미사를 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감사의 제사”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성공회가 전례용어를 바꾸면서 미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감사 성찬례란”이름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 행위는 그 근본이 감사입니다. 때문에 감사가 없는 믿음이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참된 감사란 무엇입니까? 재물을 드리는 것입니까?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도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한다면 2% 부족한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감사란 무엇일까요? 변화된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로의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이요, “진정한 예배”요, “영적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는 참된 감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나병환자 10명이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수험생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대학에 합격하는 것 아닙니까? 실직자에게 소원은 무엇일까요? 직업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병환자의 소원은 분명합니다. 그 병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한하운 시인의 “소록도 가는 길” 시가 있습니다. 저는 이보다 문둥이의 아픔을 노래한 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이다.

낯선 친구를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릿길 전라도 길


저는 이보다 더 절절한 아픔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을 금수강산이라 합니다. 산 좋고 물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좋은 강산도 자신에게는 흙먼지 날리는 황톳길일 뿐입니다. 서산의 낙조를 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 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을 반겨줄 사람이라고는 형제도 친구도 사랑하는 여인도 떠나고 오직 문둥이들뿐입니다. 신을 벗으면 떨어져 나가는 발가락을 보면서 느끼는 고통은 어떨까요? 이처럼 문둥이는 세상으로부터,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마음의 고통까지 삼중고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에게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뭔가 기원하며 살아갑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기원하고, 대학에 합격하길 기원하고,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 천형과 같은 나병이 치유되기를 갈망하면 살아가는 사람처럼 그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둥이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귀가 버쩍 뛰었을 겁니다. 이 나병환자들도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겠지요. 그러나 얼마나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겠습니까? 아파본 사람은 압니다.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천리라고 가서 치료를 받고 싶은 게 아픈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대뜸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느 환자들을 고쳐주실 때처럼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않으시고,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마저 자신을 차별하고 무시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합니다. 나만은 엘리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얼마나 화를 냈습니까?

 

그런데 더 화가 날 일은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나았을 경우 사제들에게 보여주고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의 병이 난 것도 아닌데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니요, 그런데 놀랍지요. 이들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사제를 향해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던 도중에 그들의 문둥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보기에도 놀랄만한 믿음이 아닙니까? 사실 저는 믿음을 통해 여러분도 이런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나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이런 믿음은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나병환자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놀랍게도 아직 아니라고 하십니다. 2%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는 믿음도 은혜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한 발 더 갈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은혜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되는 은총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멈춥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참된 믿음의 길,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줄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입니까?

 

먼저 삶의 모습이 바뀌어야 합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명이 아니더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사람 밖에 없단 말이냐?” 하셨습니다. 병이 치유된 것은 다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1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 돌아와”


바로 이겁니다. 아무리 나병이 치유되는 기쁨을 맛보았다할지라도 돌아서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나만이 자기 고집을 버리고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했을 때 문둥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끝났다면 그는 육신은 치유되어 잠시 기쁨을 맛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기쁨은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5장 17절을 보십시오.


“이제부터 저는 야훼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삶의 전환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믿음이 좋았다고 하는 히즈키야 왕을 보십시오. 히즈키아 왕은 큰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히즈키야는 벽을 향해 얼굴을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히즈키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느님께서는 수명을 십 오년 연장시켜 주시겠다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히즈키아왕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바빌론에서 사절단을 보내 축하했습니다. 이 때 히즈키아 왕은 그 사절단을 환대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바로 그 때 이사야 선지자가 그 광경을 보고 왕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왕은 “바빌론에서 온 사절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사야는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이시여,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습니까?”


왕은 자신의 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왕에게 “이 모든 것이 바빌론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옮겨 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였습니까? 자신이 이루어 논 업적은 자랑하면서 정작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빠졌습니다. 은혜를 입었지만 삶의 변화는 없었던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우리를 참된 구원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나병환자를 보십시오. 그는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찬양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향해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입니다. 자신의 삶을 예수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치유의 기쁨을 작은 소리가 아니라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큰 소리입니다. 여러분 큰소리를 내보셨습니까? 어떻게 해야 큰 소리가 나옵니까? 있는 힘을 다하지 않고는 큰소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있는 힘을 다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찬양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있는 힘을 다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범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있는 힘을 다한 다는 것” 그것은 “범사”입니다. 좋을 때도 감사, 나쁠 때도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시와 같은 고통이 있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감추고 싶었던 가시를 당당하게 자랑했습니다. 당당하게 간증했습니다. 이게 범사입니다. 좋을 때만 감사가 아니라 내 처지가 힘들고 어려울 때도 감사하는 마음, 이게 범사요,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큰 소리로 찬양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유할 때나 곤궁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의 입에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간증이 나와야 합니다.


바울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1데살5:18) 어떤 처지에 있든지 찬양하십시오. 그 찬양은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르도록 이끌어 줍니다.


모든 영광을 오직 하느님께 드려 감사하십시오. 이게 찬양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1고린10:31)


그리고 돌아섰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보다 중요한 말씀은 없습니다. 돌아섰다는 말은 삶의 목표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세상 적인 가치관으로 살던 사람, 자신의 생각대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돌아서서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예수에게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내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9명의 나병환자는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지만 변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목표가 바뀌지 않았고 삶의 모습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목표가 바뀌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삶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 자랑해 왔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자랑했던 자신의 명예와 지식은 버리고 예수에 대한 자랑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여기까지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뭐가 없습니까? 변화가 없습니다. 삶의 목표와 모습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처럼 삶의 모습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나병이 치유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명예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로마12:1-2)


예전에는 율법으로,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그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면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게 된 것입니다. (로마12:1-2)


그렇다면 그렇게도 믿음이 좋았던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이 왜 돌아서지 못했을까요? 받는 것에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받을 때는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영광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으려고만 한다면 그 믿음은 곧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받으려 하는 믿음, 이것을 공로라고 합니다. 이것을 했으니 이것을 주십시오. 이게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사는 주는 감사입니다. 이것은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변화된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변화될 때 비로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믿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육신이 치유되고, 범사가 잘되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살아가는 제자가, 나는 빚쟁이입니다. 내 자신을 주님께 바칩니다. 라고 하십니다.


끝으로 에페소서 2장 22-24장 말씀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합니다”(에페4:22-24) 아멘.